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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관료의 자조와 생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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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공무원 사회를 보면 두가지 점이 눈에 띈다. 하나는 공무원 스스로의 자조(自嘲)가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면서도 이익 집단으로서의 성격 또한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다.

중앙인사위원회 통계를 보면 행정고시 최종 경쟁률이 1999년에는 81대1, 2000년에는 64대1, 올해는 45대1로 크게 떨어지고 있다. 행시 지원자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있던 사람들도 나가고 있다.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민간기업의 더 좋은 자리를 찾아 스스로 나간다.

주목할 것은 그 이유보다 이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어떤 고위 공무원은 최근 다음과 같이 필자에게 말했다. "왜 우수한 사무관.과장이 아직도 쓸데 없는 서류를 들고 왔다갔다 해야 하는가. 이제 국가 경쟁력은 기업 경쟁력인데 우수한 사람들이 관(官)에 있지 말고 민간 기업에 가서 능력껏 일을 해야 한다. "

그런가 하면 어떤 기업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부에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있으면 족하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관청에 한데 몰려 있으니 그 좋은 머리로 교묘한 규제나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

한마디로 이제 관청 안에서든 밖에서든 행정 관료에 대한 엘리트 의식은 많이 줄어들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최근의 빈번한 인사를 보면 관료는 아직도 막강한 이익 집단이고, 또 공정거래위원회의 신문고시 등 새로운 규제를 보면 관료는 여전히 머리 좋은 권력 집단이다.

장.차관들이 자주 바뀌면서 관료 사회에도 적잖은 세대 교체가 벌어졌고 후속 인사도 많았다. 그 인사는 아직도 이런 식이다.

"행시 몇회가 이번에 승진하니 자리를 골고루 나눈다. 행시 몇회가 이번에 옷을 벗으니 산하기관에 자리를 마련한다. "

이같은 인사 방식에서 자유로운 장.차관은 거의 없다. 그 자신 사무관.과장.국장 시절 '행시 몇회' 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설혹 행시 출신이 아니더라도 그 룰을 깼다가는 대단한 반발에 부닥친다. 산하기관에 자리를 만들어주지 못하면 '무능하고 인정머리 없는 장.차관' 이라는 비난에 뒤통수가 따갑다.

금융감독위원회의 위원장.부위원장.위원들이 뻔질나게 바뀐 것이 대표적 예다. 임기고 뭐고, 전문성이 있든 없든, 자리 마련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이남기(李南基) 공정거래위원장이 부위원장 시절 연임 규정을 어겼으므로 자격이 없다는 시비에 휘말린 것처럼 때로는 자리를 지키기 위한 무리수도 서슴지 않는다.

머리 좋은 사람들이 권력을 어떻게 쓰는지는 다음의 최근 사례들이 잘 말해준다. 현대의 대북 사업이 어렵게 된 상황에서 정부는 현대차에 대한 뒷조사를 벌였다. 현대차가 현대건설의 지원을 받았던 기록이 나오면 이를 근거로 현대차는 코가 꿰어 대북 사업의 일부를 떠맡게 될 판이었다. 불행히(□) 현대건설이 현대차를 지원한 흔적은 나오지 않았고 덕분에 현대차는 대북 사업에 코를 꿰이지 않았다.

신문고시(告示)가 없어진 것은 99년 1월이었다. 이때 규제개혁위원회에서는 고시를 없애려는 민간위원과 지키려는 관료 사이에 작은 논쟁이 있었다고 당시의 한 민간위원은 전했다.

"신문고시를 없애면 언론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이 약해집니다. "

"바로 그래서 없애야 한다는 겁니다. "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는 뻔하고, 그런 신문고시를 부활하려니 웬만큼 좋은 머리가 아니고는 어림도 없다.

자, 관료 집단의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마디로 우수한 집단에 대한 정상적 인센티브는 망가지고 있는 반면, 자의적(恣意的) 권력에 빌붙는 비정상적 인센티브는 더욱 더 내밀(內密)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단 행정 관료 집단만이 그러할까?

검찰.국세청 등 이른바 힘 센 곳일수록 열심히 올바르게 일하는 사람에 대한 합리적.정상적 인센티브가 망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행시.사시에 합격한 우수한 집단을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국가의 장래가 걸린 문제다. 이들은 자조해서도 안되고 이익집단이 되어서도 안된다.

중앙인사위원회는 최근 고시(考試)제도 개선안을 논의하고 있지만 시험과목 바꾸는 식의 접근에는 한계가 있다.

보수.승진 등에서는 합리적 인센티브를 주고, 정치 권력에 기대는 비합리적 인센티브는 끊어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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