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전철로 가는 중국 여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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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와, 사자다!"
"에이, 우리 가게 앞에서도 해줘."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중국 전통 사자춤을 추고 있는 정무문(精武門) 단원들. 상대의 어깨 위로 오르는 등 고난도 기술이 필요하기에 주로 무술도장을 통해 전수된다. 복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이 있어 사자가 지나갈 때면 모든 가게들은 문을 열고 반갑게 맞는다.

하늘 높이 솟은 붉은 기둥들. 다른 세계로의 입구를 알리는 웅장한 패루. 눈알을 번뜩이며 그 옆을 지키는 사자석상. 길 따라 걸려 있는 홍등. 뇌쇄적인 전통의상의 여성. 알아들을 수 없는 노파의 시끄러운 외침….

영화나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차이나타운의 이미지다. 사전에선 '화교들이 외국 도시의 일부분을 차지, 중국식 시가지를 만든 곳'을 차이나타운이라 설명한다. 화교가 사는 곳이면 세계 어디라도 있다고 한다. 지금 한국에 있는 화교는 2만여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엔 차이나타운이 없다. 영화에서 기대한 그런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아니, '없어졌다'는 게 맞겠다.

한국 화교의 시작은 19세기 말 임오군란 당시 청군이 들어오면서다. 이후 산둥성과 정기선이 오가던 인천에 중국 상인들이 몰렸고 화교촌을 만들었다. 나름의 경제권을 형성하며 대를 이어 정착했던 그들에게 한국 정부가 가한 시련은 가혹했다. 외국인 토지소유제한 조치로 명의를 넘겨받은 한국인 부인은 야반도주했고 땅속에 묻어둔 현금다발은 화폐개혁으로 휴지조각이 됐다. 사람들은 하나 둘 대만.미국으로 떠났고, 이곳 북성동 일대는 빈민굴의 대명사처럼 돼버렸다.

그랬던 이곳이 지금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 먼저 손을 내민 건 한국이었다. '지자체 사업'이란 이름으로 차이나타운 개발 계획이 수립됐다. 패루를 다시 세우고 전신주는 모두 땅속에 묻는 등 새 단장을 했다. 그러나 한번 떠난 사람들은 돌아오려 하지 않았다. 결국 중국 본토의 자본을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화교를 수혈하는 수밖에 없었다. 철이 되면 김치를 담가 먹고 한국말이 더 편하다는 토박이 화교들. 이제 와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은 없다고 했다. 단지 수십년간 가슴속에 묻어둔 한마리 용이 다시 한번 크게 몸을 틀며 솟아오르는 것을 보고픈 마음은 여전한 듯했다.

인천=김필규 기자 <phil9@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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