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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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49. 외환거래 자유화

권력기관 기관원, 재무부 출입기자 등의 반대 지원사격과 한국은행 외환관리부의 반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대부분의 외환거래 업무를 시중은행에 넘기고 말았다. 오일 쇼크의 한 복판에서 사실상 외환경비의 자율화를 실현한 것이다.

그 후 서정쇄신(庶政刷新) 바람이 불어닥쳤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가장 많이 걸려드는 곳이 외환국이었는데 허가사무를 넘겨주고 나니 걸려들 일이 없었다. 그 덕분에 나는 훈장을 받았다. 그제서야 다들 허가사무 넘겨 주길 잘했다고 말했다.

외환자유화에 관한 논의는 오일 쇼크 때 처음 시작됐다. 그 전에는 외환자유화의 개념조차 없었을 뿐더러 그런 얘기가 나와도 믿으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외환자유화의 필요성은 오일 달러를 구하러 중동을 오가면서 인도를 경유할 때마다 피부로 느꼈다.

인도 공항에 내리면 외환에 대한 규제가 하도 심해 관광이고 뭐고 아무 생각이 없었다. 나중엔 아예 인도로 가는 길을 피하게 됐다.

내가 외환자유화에 처음 눈뜬 것은 1970년대 초반 주영대사관 재무관으로 런던에 근무할 때였다.

국제금융 시장에서는 돈이 일단 빠져나가기 시작하면 한 푼도 남김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런 사태를 당시 오일 쇼크와 97년 말 우리나라의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때 나는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그 후 외국은행에 국내 지점.사무소 개설 허가를 내 줄 때의 일이다. 일부에서는 이들 외국은행이 원화 예금 받는 것을 통제하고 내국인 직원을 일정 비율 이상 쓰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같은 이른바 '외국은행 진출 위험론' 에 대해 나는 끝까지 반대했다. 원화 예금을 많이 유치하려면 예나 지금이나 기본적으로 점포수가 많아야 한다. 지점 한 곳 내 주고 원화 예금 받는 것을 제한해 봤자 규제한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한국인 직원을 채용하는 문제도 그렇다. 인건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자기들이 알아서 지점장.회계 책임자 등 한두 사람 말고는 현지인을 쓰게 마련이다. 우리 은행원도 언젠가는 수출 상품이 될 수 있다는 게 당시 나의 지론이었다.

결국 외국은행 지점 개설에 따르는 의무조항들을 따로 두지 않았다. 훗날 이들은 지점장까지도 한국인을 썼다. 홍콩.호주 등 외국 은행의 해외 지점에 한국 출신 지점장이 근무하는 일도 생겼다.

나는 신용 카드의 해외여행 경비 사용한도도 없애 버렸다. 그 후 다시 한도가 생겨 나기는 했지만, 사실 신용 카드 사용은 기록이 남기 때문에 굳이 한도를 둘 필요가 없다.

외환은 일단 풀고 나면 다소 어려워지더라도 다시 옥죄어선 안 된다. 풀고 나서 견디는 것이야말로 모든 자유화 정책의 요체다.

97년 말 외환위기 당시 뉴욕행 비행기에서 만난 조셉 스티글리츠 세계은행 수석부총재에게 내가 "어려운 때일수록 외환을 관리하려 해선 안 된다" 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문교부가 주관했던 유학생 선발 시험제도를 사실상 폐지한 것도 나다. 당시 이미 일본.대만 등의 학생들은 견문을 넓히러 우리나라에 수학여행을 왔다. 반면 우리 젊은이들은 해외로 나가는 길이 봉쇄돼 있었다.

밖에 나가 공부를 하겠다면 내보내야 한다. 나가서 못할 수도 있지만 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누가 미리 알겠는가?

나는 관광 비자로 가든 밀항선을 타든 외국의 학교에 다닌다는 증명서를 떼 오면 학비 실비와 한 달에 1천 달러까지 생활비를 부칠 수 있도록 해당 규정을 고쳤다. 문교부 주관의 유학생 시험을 치르지 않더라도 유학 경비를 보낼 수 있는 길을 터 준 것이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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