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조폭 맞죠” …순이는 용감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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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일하는 팀은 달랐지만 순이는 4년 넘게 한 직장에서 근무했던 동료였다. 그는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살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래서 지금은 사는 대로 생각하는지 생각하는 대로 사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나는 순이가 야무지게 잘살 거라는 믿음이 있다.

어느 해 초겨울 회사 동료 몇이 모여 술을 마셨다. 술집에는 우리 말고 다른 손님들도 있었다. 일행이 많아 여러 테이블에 나누어 앉은 그들은 조금 특별했다. 짧은 머리, 굵은 목, 벌어진 어깨, 검은 정장. 그들에게서 뻐근한 조직의 냄새가 났다.
나 역시 외모는 물론 행동도 갈 데 없는 인근 불량배지만 어디까지나 ‘독고다이’인지라 체질적으로 조직을 싫어한다. 실은 무서워한다. 검정색 양복만 봐도 털이 바짝 서고 뼈가 뻣뻣해지는 나는. 그날도 ‘앗, 뜨거라’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좌불안석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데 순이는 달랐다.

큰 목소리로 “어머 저 사람들 깍두기 아냐?”하며 덩치들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아마 웃통을 벗으면 용 두 마리가 등과 가슴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어깨들을 향해 손가락질한다. 나는 순이가 싫었다. 미웠다. 저들이 시비라도 걸면 어쩌자고 자꾸 쳐다보는가. 어쩌자고 우렁찬 목소리를 내며 모션 큰 삿대질을 한단 말인가.

나는 똥줄이 탔다. 아무런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웃고 있었지만 덜덜 떨고 있는 턱을 멈출 재간이 없었다. 어떻게 그 자리를 빠져 나왔는지 기억이 없다. 아무튼 누구보다 빨리 바깥으로 나온 나는 초조하게 일행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그때 나는 보았다. 일행 중 가장 나중에 나온 순이가 보초를 서고 있는 젊은 정장에게 생글거리며 다가가는 것을. 그의 강인해 보이는 사각 턱 밑에 바짝 붙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아저씨, 조폭 맞죠?”
나는 순이보다 내가 더 미웠다. 그런 술자리에 간 자신을 욕하고 또 욕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놓았다. 오직 걸음만이 나를 살릴 것을 굳게 믿으며 말이다. 그런데 순이는 다정하고 느끼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김 팀장님, 같이 가요!”
그 일이 있은 후 순이가 있는 술자리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고 다짐했지만 결국 몇 번인가 더 순이와 술을 마시고 말았다. 술에 취한 내가 순이에게 얼마나 다정했는지, 허물없이 굴었는지 기억이 없다. 사실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의 대부분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같이 술 마신 다음 날 처음 보는 사람처럼 서먹해 하면서 깍듯하게 자신을 대하는 나를 보면 순이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왜 이러세요 정말. 술값 아깝게.”
지금은 중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순이가 e-메일을 보내왔다.

“강남역에서 먹었던 조개구이와 소주,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실물보다 더 예쁘고 밝게 그려주신 캐리커처도.”
내가 캐리커처를 실물보다 훨씬 예쁘고 밝게 그려준 것은 맞지만 조개구이와 소주를 먹었던 곳이 어딘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순이에게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혹시 사당역 아니었나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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