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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4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45. 미주지점 부실정리

당시 우리나라가 영국산 스카치 위스키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하면 미국산 쇠고기를 사 주지 않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통상 문제가 빚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국세청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재무장관으로서 '직권 발동' 을 해서라도 막겠다고 말했다. 재무부 세제국 사람을 통해 이 얘기를 전해 들은 안무혁(安武赫) 국세청장(현 한국발전연구원 이사장)은 발표날짜까지 잡아 놓았던 스카치 위스키 원액 국산화 계획을 조용히 철회했다.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유럽 순방 수행을 앞두고 있던 김만제(金滿堤) 부총리(현 한나라당 의원)에게 나는 "스카치 위스키 문제는 내 책임하에 처리하겠다" 고 말했었다. 마음이 놓인 그는 안심하고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군출신이었던 안청장도 점잖은 사람이었다.

1987년 나는 부총리가 됐고 그는 안기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가 열리면 우리는 사회를 서로 양보하며 터놓고 협의를 했다. 우리는 둘 다 시국문제를 신중하게 처리하자는 입장이었다.

6.29 선언을 한 지 두 달여가 지난 그 해 9월 2일 보고 받은 노사분규 현황을 보면 7월 이후의 분규 건수가 2천9백29건에 달했다. 두 달여 동안의 분규 건수가 그 해 들어 6.29까지의 6개월간 분규 건수의 무려 24배나 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안기부와 경찰의 수뇌부는 '노사 분규 해결은 노사 자율에 맡겨야 한다' 는 입장을 견지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안기부와 경찰은 공권력 투입 등에 대해 상당히 신중했다. 문제가 되면 책임을 져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정치인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시 외환은행장 시절.

83년 여름 행장에 취임한 직후 나는 외환은행의 자체 부실을 정리했다. 경남기업 부실 문제가 불거질 무렵이었다.

당시 미국 교민사회에서는 "KAL(대한항공)기 타고 와 외환은행 돈 못 먹으면 바보" 라는 소리가 유행할 만큼 외환은행 미주 지점들의 부실은 심각한 지경에 있었다. 해외 지점의 부실도 대부분 '부실 융자' 과정에서 생긴 것들이었다. 지점장이 바뀌었지만 전임자 때 생긴 부실을 손 못대고 후임자에게 떠넘긴 결과 부실 채권은 계속 쌓였다. 이른바 '선송' (先送)이라는 금융기관의 관행으로 빚어진 당연한 귀결이었다.

나는 LA.뉴욕.시카고 등의 지점에 "부실 자체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을 테니 부실 채권을 결손 처리하라" 고 지시했다. "내가 책임 져 줄 테니 부실 채권일랑 태평양에 빠트리라" 고 말했다.

부실기업 문제를 처리하기에 앞서 은행 내부의 부실을 먼저 털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67년 창립 이후 쌓인 외환은행의 부실을 총정리했다. 그 덕에 나는 부실기업 정리 때 "부실 정리는 은행장이 앞장서야 한다" 고 말할 수 있었다.

이승만(李承晩) 정부 시절인 59년 재무부 외환과 임시 서기로 공직에 들어서 80년 차관 승진을 할 때까지 나는 우리나라 외환관리의 큰 틀을 짜고 이를 다듬는 역할을 했다. 그동안 단일변동환율제로의 전환(64년), 복수통화바스켓에 의한 변동환율제 채택(80년) 등 20여 차례에 걸친 외환관리 규정 개정 중 열세번의 개정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5.16이 일어나던 해인 61년 12월 마지막 날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두 가지 안건을 통과시키고 해산했다. 하나가 외환관리법 제정, 다른 하나가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였던 이탈리아 어업차관 도입건이었다. 당시 나는 외환과에서 법규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외환관리와 관련한 규정이라고는 군정법령 93호였던 '외국과의 무역에 관한 규정' 밖에 없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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