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산악 사진작가 안승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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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1998년 초반 부산에서 백두산을 주제로 한 남북 사진작가 2인전이 열렸다. 안승일과 북한의 김용남이 주인공이었다.

그때 마침 초도 순시차 부산에 들른 DJ가 전시장을 찾았다. 그 지엄한 자리에 정작 안승일은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통령이 온다는 소식에 부산역으로 가 서울로 튄 것이다.

"양복을 입어본 적이 한번도 없어, 대통령께 실례할까 봐 피했다" 는 게 그의 '도주변' 이다. 그는 참으로 '대책없는 순수' 다.

새 밀레니엄의 도래를 알리는 2000년 1월1일 본지 1면을 장식한 백두산 사진이 안승일의 작품이다. 우리 민족의 용틀임치는 정기를 겨울의 천지 상공에서 포착한 그 사진은 그 장쾌무비로 같은 날자 타지를 압도했다.

본지는 뒤풀이로 그날 1면을 액자에 넣어 각 가정에 보급했다. 해서 안승일의 사진은 지금도 어느 가정의 거실 혹은 공부방에 걸려 그가 바라던 바 백두산의 기상을 뿜어내고 있을 것이다.

안승일은 94년부터 해마다 1년에 몇번씩 백두산에 가 백운봉(최고봉인 북한령 장군봉 다음의 봉우리)에 아예 두어달간 텐트를 치고 사진을 찍거나 원.근경을 잡기 위해 백두산 자락을 무슨 짐승처럼 누벼 왔다.

그러나 그는 요즘 중국 당국으로부터 요주의 인물이 되어 있다. 백두산을 소재로 만든 달력에 '한국의 산' 이라고 무심히 표제한 것이 화가 됐다.

그는 이 달력 20여부를 갖고 그동안 그를 도와준 중국의 공원보호국에 선물한 것이 도리어 백두산을 한국산이라고 인식시키는 인물이라고 찍힌 것이다.

그는 정녕 산과 같은 사람이다. 그 자신 산쟁이이자 산 사진 전문가여서만 그렇지는 않다. 타고난 성품이 산과 같다는 뜻이다. 세속적 삶에 대해 바보같을만큼 무관심한데다 그로 인한 손해쯤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가 산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순수해서 세속의 손해를 감수하는 그인만큼 산을 향한 그의 열정은 하나의 전설로 만들어줘도 크게 잘못되지는 않을 것 같다. 변화가 시대의 화두라고는 하지만 산을 향한 그의 일편단심은 그를 세속적 변화에는 아예 무관심한 체질로 바꾸어 놓은 것 같다.

그는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닌다. 가령 체크무늬 남방셔츠는 같은 모양 같은 색깔로 15장을 구해 놓고 갈아 입는다. 이발를 할 땐 어느 목욕탕 이발사에게 16년째 맡겼다.

얼마전 그 이발사가 일하는 목욕탕 영업이 잘 안돼 그만 뒀을 땐 이발사의 전화번호를 받아 놓고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때까진 이발도 안할 작정이다.

"그 사람이 만일 인천쯤에서 다시 영업을 하면 인천까지 가야지 어쩌겠느냐" 것이다.

현재 쓰는 충무로의 사무실도 처음 구한 그자리에서 22년째를 보내고 있다.

그는 왼쪽 다리를 다른 사람의 눈에 뜨일 정도로 전다. 산은 소년 시절 그의 그런 열패감을 넉넉하게 받아준 어머니 같은 구원이었다. 중학생 때 신체적 결함을 정신적으로 이겨내기 위해 그는 유도부와 권투체육관을 들어 갔다.

그러나 상대방이 유도에선 그의 저는 다리만을 노리고, 복싱 또한 스텝이 되지 않아 그만 뒀다고 했다.

산을 만난 건 그에게 운명적 발견이었다. 산길을 오르락내리락할 땐 저는 다리가 스스로 감춰졌고 산에서 만난 산친구들은 그의 다리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다.

사진 또한 운명적 만남이었다. 중학교 때 취미를 붙인 사진은 고교 시절 산과 함께 그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는 처음엔 건대 원예과에 들어갔으나 농사짓는 법을 배우기 보다는 산에 가 암벽을 타는 게 더 즐거웠다.

대학 2년 때 암벽등반 중 놓친 해머가 저 아래 있던 서울대생의 머리를 다치게 해 그 치료비로 싫다는 그 친구에게 등록금을 주고난 뒤 서라벌예대 사진과에 들어갔다. 당시 그는 이미 산에 관한 사진이 전시회를 열만큼 모아진 상태였다.

"사진과에서 사진기 다루는 법부터 가르치길래" 또 학교를 그만 둔 그는 그때부터 출가하듯 사진기와 등산장비를 걸머지고 입산했다.

그 이후 그의 집요한 산사진 작업은 사진계에서 하나의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다. 82년 펴낸 사진집 '삼각산' 의 경우 삼각산(북한산)의 모든 것을 담기 위해 네번이나 북한산 주변의 집에 방 한칸 세를 내 몇년간 작업했다.

70년대 중반 그는 생계를 위해 충무로에서 광고사진을 찍고있었는데 퇴근 후에는 바로 백운산장이나 인수산장 또는 세를 든 집으로 찾아 갔다.

광고사진으로 번 돈은 그런 작업에 모두 들어갔고 혹 남는 돈은 그의 사무실 궤짝에 무조건 던져 놓았다. 몇 년후 궤짝을 열어보니 그 안에 당시 그의 아버지가 살던 시흥 산동네 집 값의 몇 배나 되는 돈이 들어 있었다.

"제 아버지가 훌륭하신 분입니다. '이 돈을 어떻게 할까요' 여쭸더니 '너 좋아하는 사진에 써라' 고 말씀합디다. "

'삼각산' 출간은 그렇게 이뤄졌다. '삼각산' 은 북한산의 전모를 담아낸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사진집으로 지금 남아 있다.

사진집 '한라산' 역시 한라산의 진면목을 나타낸 가장 우수한 사진들로 평가받고 있다. 80년 후반 2년간 그는 한라산을 찍기 위해 제주도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한라산 사진들은 가짜라고 말한다.

"사진에 제대로 피사체의 진실을 담으려면 대상과 철저하게 친해야 됩니다. 속속들이 대상을 알지 못하면 거죽만 찍게 됩니다. 혼이 없는겁니다. 한라산을 제대로 알려면 2년으로는 근처에도 못갑니다. 그래서 한라산 사진들은 가짜입니다. "

그의 이같은 사진철학이 속속들이 배긴 사진집이 바로 95년 펴낸 '굴피집' 이다. 강원도 평창의 외딴 산골에 홀로 있는 굴피집을 그는 무려 10년간 찾아 갔다. 그 굴피집에 사는 순박한 부부와 더불어 그는 10년 세월을 함께 늙으며 사진을 찍었다.

"잘은 모르지만 한 몇달 찍으면 사진집이 대충 나오는 줄 알았는데 5년이 지나도 7년이 지나도 책은 안나오고 사진만 찍어대는 그를 보고 먼 동네 사람들은 '그 사람 간첩일지 모르니 조심하라' 고 할 정도였다. " 는 게 굴피집 부부의 얘기다.

'굴피집' 에는 도시사람은 물론 시골사람도 모를 한국산골의 원형적 정서가 가득하다. 사진집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사진속 부부와 동일시되는 정서에 휩싸이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안승일은 책에 담은 사진 한 장 한 장 모두 짧게는 몇달 길게는 10년의 세월을 기다려 건져올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컨대 폭설이 내려 굴피집이 하나의 설동(雪洞)이 되는 것을 찍기 위해 8년간을 기다렸고 그 때 그는 사흘이나 눈속을 뚫고 그 집을 찾았다. 또 굴피집 마당의 말뚝에 내려 앉은 새는 새 앞 1미터도 안되는 곳에서 찍을 수 있었다.

새조차도 남을 그리워 하는 그 동네이기에 안승일은 "새가 자신을 그러워 했고 그때문에 달아나지 않았다" 고 믿고 있다.

사진집 '아리랑' 은 그가 백두산의 원경을 잡기 위해 두만강, 압록강의 길을 따라 가다 "사무치는 격정에 못이겨" 북한땅을 담은 것이다.

"나는 민족이니 뭐니 하는 것엔 별 관심이 없었어요. 다만 사람은 산처럼 살아야된다는 믿음은 종교 비슷했어요. 그런데 94년 백두산에 처음 가보고 바로 여기로구나 내가 사진을 찍을 곳은 여기구나 하는 충격이 옵디다. 그런데 백두산의 모든 것을 찍겠다고 두만강변을 따라 가는데 거기 우리 동포들이 있더라구요. 당시 TV에서는 북한사람들이 C어 죽네 뭐네 하는데 그 사람들 모습이 그렇게 정겹고 따듯하게 느껴집디다. 눈물이 쏟아지더라구요. "

비록 중국 땅에서 바라본 북녘 땅이지만 '아리랑' 만큼 그곳을 아름답게 담아낸 사진은 일찌기 없을 것이다. 96년 무렵 그는 압록강 중류 부근에서 일종의 잠복처럼 숨어 북녘 땅을 찍다가 동네 개에게 허벅지 부근을 심하게 물렸다. 지금도 5센티미터 가량의 흉터가 생생한데 그는 다음해에 그 동네를 다시 찾아가 그를 문 개와 개주인의 사진을 찍어주고 왔다.

안승일은 이제껏 사진집 모두를 사재를 털어 출간했다. 열악한 사진집 출판 시장에서 책을 내주겠노라고 나설 출판사가 있기도 만무고, 그 자신을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통에 '한국 유수의 사진작가' 인 그는 아직도 집한칸 없는 처지다. 10여평짜리 집이 한 채 있기는 하지만 남에게 세주고 아는 집에 얹혀 산다. 그는 이런 사정은 쓰지말라고 부탁했다.

북한산을 찍기 위해 4번째인가 구한 셋방은 지난해 백두산에 갔다와서 들러봤더니 그 동네에 도로가 생기면서 집이 없어졌더라고 했다. 주인은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져버렸고. 그는 전세금을 못받은것도 안타깝지만 그보다는 그 방에 갖다둔 사진자료집 같은 물건을 못찾아 "좀 한심하다" 고 말했다.

안승일은 사진때문에 인생과 '재산' 을 다 날려 "차라리 그 돈으로 땅이나 샀으면 부자가 됐을 것" 이라는 '후회' 도 해보지만 젊은 시절 사진집을 내는 것이 꿈이었고 그 꿈을 조금이나마 이뤘으니 그나마도 감지덕지할 일이라고 말했다.

이헌익 스포츠.문화 에디터

사진=김형수 기자

<안승일 사진작가 약력>

▶1946년 서울 출생

▶70년 서라벌예대 사진과 중퇴

▶70년 제1회 사진전 - 한국의 산

▶75~78년 김동수 선생 사사

▶79년 그린스튜디오 설립

▶82년 사진전 '산' (흑백) 출간

▶94년 제3회 사진전 - 일본 이와하시와 2인전 '백두산'

▶98년 제4회 사진전 - 북한 김용남과 2인전 '백두산'

▶99년 사진집 『아리랑』 출간

▶현재 그린스튜디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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