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민정당의 깊은 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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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DJP 공동정부의 고위 당정회의를 보면 옛 민정당이 부활했나 착각할 정도다.

이한동(李漢東)총리.김중권(金重權)민주당대표.김종호(金宗鎬)자민련 총재권한대행 모두 민정당 시절 잘 나가던 인물들이다.

이제 DJP+α체제가 됐으니 민국당의 김윤환(金潤煥)대표도 동석할테고, 그림은 더욱 환상적이 될 것 같다.

*** 兩金진영내 인재풀 빈약

타임머신을 타고 1986년 가을께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어쩌면 인사동 민정당사 근처에서 이들 4인의 회동장면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이들 4인은 집권 민정당의 총무(이한동)와 정책위부의장(김중권), 그리고 내무장관(김종호).청와대정무수석(김윤환) 등 요직에 앉아 있었다. 시국 현안 발생 때 자리를 함께 함직한 멤버다.

김대중(金大中)민추협공동의장의 움직임도 중요 현안이었으니 혹시 가택연금 같은 걸 논의하기 위해 이들 4인이 회의를 한 적은 없었을까□

그러고 보면 민정당의 뿌리가 의외로 깊은데 놀라게 된다. 특히 한나라당엔 민정당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부총재 11명 중 6명이 민정당 출신이고 김기배(金杞培)총장.정창화(鄭昌和)총무 등 핵심 당직자들도 그렇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은 민정.민주.공화 3당합당을 두고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 그 후신인 한나라당의 당내 역학구도를 보면 YS계는 저만치 밀려나 있다. 집권의 영화는 한 때에 불과했으니 결과적으로 호랑이에잡혀 먹힌 형국이 아닌가.

민정당 정권은 '양金' 에게 타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양金이 대를 이어 정권을 잡은 현 시점에도 민정당 인사들은 오히려 제도 정치권에서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은 현상은 민정당 출신 개개인의 유능함으로도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민주화 세력으로 일컬어지는 양金 진영 내 인재풀이 빈약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할 듯 싶다. 특히 주변인물들이 특정지역으로 국한돼 있는 약점을 보완하려다보니 옛 민정당 식구들에게 손길을 내민 게 아닐까.

민주화 세력의 폭과 층을 넓히지 못한건 양金 정치의 또다른 실패작이다. 참신하고 깨끗하고 능력있는 인재를 두루 발굴해 개혁의 주체세력으로 내세웠다면 개혁이 지금처럼 휘청거리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구태정치에 익숙한 인사들이나 끌어들이고 가신(家臣)과 측근들로 주변을 에워싸니 거기서 무슨 새로운 비전이 나올 수 있겠는가.

최근의 당정인사에선 이런 저런 이유로 물러났던 인사들을 다시 불러들임으로써 인재풀의 한계를 더욱 확인시켜줬다. 금융스캔들로 물러났던 박지원(朴智元)전 장관의 청와대 비서실 복귀, 과격한 교육개혁으로 교육계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이해찬(李海瓚)의원의 정책위의장 재기용, 거기다 가신 정치 청산이란 명분 아래 물러났던 동교동계 좌장 권노갑(權魯甲)씨까지 재등장했다. '인재가 그렇게 없나' 라는 생각에 안타깝고, 인재를 찾아 쓰려는 고심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으니 실망스러운 것이다.

특히 權씨의 경우에선 패거리 정치의 전형을 보는듯해 민망스럽다. 權씨는 정동영(鄭東泳)최고위원에게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 패거리 정치까지 닮은 꼴

鄭의원이 무엇을 잘못했나. 지난해 12월 대통령과 權씨 면전에서 가신 정치의 폐단을 지적하고 權씨의 2선후퇴를 건의한 鄭의원의 행동은 용기있는 행동으로 찬사를 받았다. 건의 내용도 민심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權씨는 그게 잘못됐다고 한다.

權씨가 묻고 있는 鄭의원의 죄는 '배신' 이다. '키워준 공' 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키워줬다면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키워줬다느니, 배신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들이야말로 주먹세계에나 어울리는 패거리 논리다.

민정당 정권에 대해 군부 패거리 정치라고 규탄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군부출신들이 앉았던 자리를 상도동 사람들이 차지하더니 이젠 동교동 사람들이 꿰찼다. 출신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패거리 정치다. 양金이 목청을 높인 게 '군부독재 타도' 였다.

그러나 그들 역시 '문민독재' 니 '인치(人治)' 니, 심지어 '제왕적' 이란 소리까지 듣고 있다. 우리 속담에 '욕하면서 배운다' 더니 그 짝이다.

새 피를 수혈하지 못한 게 실패라면, 자신들이 혐오하고 비판했던 정치행태를 되풀이하는 것도 죄가 될 수 있다.

허남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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