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한 큰데 불투명한 집행 ‘뒷돈 관행’ 키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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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서울시교육청 예산 집행 업무를 맡은 교육행정주사(6급) A씨(44)는 2007년 3월 창호업체 J사 대표 김모(50)씨로부터 “특정 고교의 창호공사 신청이 오면 예산 배정을 먼저 받을 수 있게 잘 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A씨는 이듬해 6월 김씨로부터 시가 2600만원짜리 중형 승용차를 뇌물로 받았다. 결국 A씨는 지난해 12월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이후 창호공사 수주 청탁과 함께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 등으로 서울시교육청 직원 8명이 추가로 구속됐다.

11일 한나라당 권영진 의원이 국민권익위원회(권익위)로부터 입수해 공개한 민원인 상대 청렴도 조사에서도 이 같은 교육계의 뇌물 관행이 확인됐다. 권익위는 지난해 9~11월 시·도교육청에서 일을 본 민원인들에게 ‘돈·상품권·선물 등 금품이나 식사·술 대접 같은 향응, 골프장 이용이나 숙박시설 등 편의를 제공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1년간 모두 몇 번 정도 제공했는지, 액수로는 얼마나 되는지도 조사했다. 권익위는 공무원에게 금품을 제공하는 행위는 위법이지만 국가 차원의 청렴도 조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기 위해 해당 민원인이 누구인지 공개하지 않고 수사기관에도 고발하지 않는다.

비위 공무원도 색출하지 않기 때문에 논란의 소지가 있다. 권익위 관계자는 “공공기관의 구체적인 비리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뇌물 공여자와 수수자를 찾아내 처벌하지는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관별 세부 자료는 해당 기관에만 통보되는데 외부로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16개 시·도교육청 한 곳도 빼지 않고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은 공무원이 있는 것으로 나온 이번 조사 결과는 다른 공공기관에 비해 일선 교육청의 청렴도가 낮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준다. 같은 조사가 진행된 474개 공공기관 중 국무총리실·외교통상부 등 220여 개 기관은 소속 공무원에게 금품·향응·편의를 제공했다는 민원인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교육청 공무원들에게 제공된 뇌물과 향응은 주로 각종 시설공사 계약을 따내거나 학교 급식 관련 비리일 가능성이 크다. 권익위는 교육청의 경우 ▶구매·용역·공사 계약 체결 ▶운동부 운영 ▶현장학습 관리·수학여행·수련회 ▶학교 급식 운영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 내 시설 심의 ▶학원 지도·점검 등 360개 업무에서 공무원과 접촉한 민원인을 상대로 조사했다. 각종 업체 선정 권한이나 재정 지원과 감독 업무가 대부분인데 공무원 권한은 막강한 반면 과정이 공개되지 않아 부패에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아 온 분야다.

교육계 안팎에선 이 같은 뇌물 관행을 줄이려면 교육청의 권한을 줄이고 행정 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영진 의원은 “교육 비리의 근본 원인은 교육행정을 담당하는 이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는 폐쇄성에 있다”며 “교원 인사제도 개선과 교육 관련 행정기관의 기능 전환, 교직사회의 문호 개방 등 종합적인 대책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04개 지역교육청도 처음 조사=권익위는 지난해 16개 시·도교육청 산하의 전국 104개 지역교육청에 대해서도 민원인 150명씩을 상대로 청렴도 조사를 했다.

서울 동부·서부·남부·성북교육청, 대전 동부교육청, 경기도 수원교육청, 전북 김제교육청, 전남 목포교육청에서 1년간 평균 100만원이 넘는 금품을 공무원에게 줬다는 민원인이 나왔다. 서울 동부, 대전 동부교육청의 경우 1년간 평균 750만5000원 상당의 금품을 건넸다는 이도 있었다. 서울 서부·남부, 전북 김제교육청은 평균 400만원가량이었다.

김성탁·박수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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