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낙동강 혈전 (54) 미군 증원 그리고 연합작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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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도로 유명한 라이프지에 얼굴을 올린 이 사람이 미 27연대장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다. 1950년 8월 국군 1사단과 함께 다부동 전선에서 북한군의 강력한 공세를 막아냈다. 그의 뒤로 보이는 곳이 계곡물을 흘려 보내는 수로에 만든 당시 27연대의 ‘하수구 CP’다.

미군의 거대한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적은 집요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폭격 다음 날인 8월 17일이었다. 미 8군에서 급파한 미 25사단 27연대 존 마이켈리스 대령이 동명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의 국군 1사단 지휘본부(CP)에 들어섰다. 그는 나중에 대장에 오르고, 미 8군 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눈빛이 유난히 빛나던 미남 장교였다. 그가 미군 증원군 1진을 끌고 우리 사단 방어 지역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임무부터 설명했다. “간선로를 지키러 왔다. 1000야드(약 914m) 도로를 500야드씩 양쪽으로 나눠 우리 연대 병력을 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착 당시 중령 계급이었지만 곧바로 대령으로 승진했다. 나는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당신 부대의 전력이 어떤 수준이냐.”

“완벽한 상태다.”

“좀 자세히 설명해 달라.” 그는 내 요구에 선뜻 “전차 1개 중대, 155㎜ 곡사포 6문, 105㎜ 곡사포 18문의 화력을 갖췄다. 공지(空地) 연락장교도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나는 내심으로 무척 기뻤다. 한국군 1개 사단의 수준을 능가하는 화력(火力)을 몰고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군 지원을 유도하는 공지 연락장교까지 데리고 왔으니 내게는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지원군이었던 셈이다.

그래도 기쁘다는 내색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더구나 얼굴의 근육에 때때로 찾아드는 감정을 그대로 반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이켈리스는 그런 나를 보면서 뭔가 더 알려 주면 좋아하겠다는 생각을 했던가 보다. “사단장,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다. 내게는 포탄 사용에 제한이 없다.” 그가 은근히 건넨 그 한마디에 내 얼굴은 나도 모르게 밝아졌다. 당시만 해도 국군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군조차 사용하는 포탄에 제한이 있었다.

매일 사단 등이 보유한 포탄의 수(數)에 따라 예하 포병부대의 포 한 문이 쏠 수 있는 포탄이 결정되는 식이었다. 그 제한이 없다는 것은 무제한으로 포를 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전선의 상황에 대비해 늘 강력한 예비 병력을 준비하는 월튼 워커 미 8군 사령관의 ‘소방부대’ 전술에 힘입은 지원이었던 것이다.

그는 나중에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오는 맥스웰 테일러의 부관을 지냈다. 테일러를 모시고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역전의 야전 지휘관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내 지프에 올라탄 뒤 그의 차량을 계속 쫓아다녔다. 그런 그의 전투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의 일 처리 솜씨는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 먼저 그가 맡을 간선로 전방을 동서로 나눠 1개 대대씩 포진한 뒤 그 남쪽으로 전차부대를 배치했다. 전방 부대 앞에는 지뢰를 매설하라고 명령했다. 전차부대 후방에는 다시 예비로 1개 대대를 포진했다. 가장 남쪽으로는 포병이 자리 잡았다. 모든 부대는 그의 지시에 따라 바로 움직였다.

그는 현장을 직접 오가며 대대장과 전차중대장에게 간단명료(簡單明瞭)하게 지시를 내렸다. 부대의 방어선을 명확하게 그었고, 각 장교들에게 임무와 위치를 거듭 확인한 뒤 이동했다. 나는 계속 그 뒤를 따라다녔다. 지켜보는 게 내게는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진지한 학습의 과정이기도 했다. 지뢰와 전선 병력, 전차와 포병이 늘어서고 마지막으로 입체적인 공중 지원까지 그가 지휘한 배치도 안에 다 담겨 있었다.

두어 시간 안에 그의 부대 배치는 끝이 났다. 굳이 표현하자면 ‘떡 반죽 뜯어 놓기’ 식이었다. 정해진 위치에 따라 이미 잘 만들어진 반죽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이었다.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준비성과 계획성, 기계처럼 움직이는 전체 부대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제국의 꿈을 꿨던 일본을 패망으로 몰고 간 미국의 힘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계곡물이 아래로 흐르도록 한 다소 큰 규모의 하수구로 들어갔다. 흙을 가득 채운 포낭(包囊)이 양 옆으로 쌓인 하수구. 그것이 그의 연대 지휘본부였다. 그 안에 지휘소를 만든 이유를 물었다. 마이켈리스는 그저 “여기가 얼마나 튼튼하냐”며 씩 웃었다. 일선 부대 지휘관이라지만, 보통은 그래도 번듯한 건물이나 좀 더 편안한 곳에 지휘소를 차리는 게 관례다. 그러나 그는 그런 관행을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는 자세였다. ‘하수구 CP’로 몸을 약간 구부리고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 사단 CP로 돌아왔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나는 국가와 국민의 명령을 이행하고 따르는 군인의 자세를 생각하고 있었다. 미군의 전투 방식, 그를 뒷받침하는 준비성과 계획성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는 다급한 상황에서 다부동 전투를 맞고 있지만, 더 배우고 더 생각할 게 많았다. 세계 최강의 미군과 본격적인 연합작전을 수행할 시간이다. 그들로부터 철저하게 배우고 익혀야 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백선엽 장군

◆공지(空地) 연락장교(ALO:air-land liaison officer)=지상과 공중을 연결하는 장교다. 6·25전쟁 당시 한국군에 파견돼 나온 공지연락장교는 대부분 미 공군 소속이었다. 당시에는 국군에 공중지원을 할 만한 자체 공군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지 연락장교들은 자체 통신 시스템을 보유하고 다니며, 육상에서 벌어지는 작전 상황을 살핀 뒤 이에 걸맞은 공중폭격 지원을 공군 작전본부에 요청한다. 공군 작전본부에서는 이들의 요청을 받은 뒤 전투기나 폭격기를 띄워 지상군 지원작전을 펼친다.

현재 한국 육군의 1·2·3 군(軍)에는 한국 공군의 중령급 장교가 상주하면서 유사시에 대비한다. 군단(軍團)급에는 공군 소령이 나와서 지상과 공중을 연결한다. 각 사단에는 자체적으로 양성한 공지 장교를 두고 있다. 사단급에서는 육군항공작전사령부의 공중 지원 전력을 활용한다. 사단에는 공군 장교가 각 사단사령부에 늘 상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사시에는 원활한 공군 지원을 위해 사단에 파견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연대급에도 공군 연락장교가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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