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대통령, 왜 헌재 비판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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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수도 이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비판했다. 국회 시정연설에서 '누구도 헌재 결정의 법적 효력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지 하루 만이다. 헌재의 결정은 입법권을 무력화했고, 이런 결정이 반복된다면 헌정 질서에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김종민 청와대 대변인은 "이 발언을 개헌이나 국민투표로 직결시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면서 "현 상황에 대한 문제 의식을 압축적으로 정리한 것이며 과거보다는 미래를 향한 제언"이라고 설명했다. 헌재에 대한 불복 선언으로 확대해석하진 말아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헌재 결정에 '처음 들어 보는 논리'라고 첫 반응을 보였던 불쾌한 심정을 좀더 구체적인 이유와 함께 강한 톤으로 표출한 점은 분명하다. 이에 따라 사법부와 행정부 최고 기관 간의 갈등도 증폭될 것 같다. 실제 헌재 측은 노 대통령의 '헌정질서 혼란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노 대통령의 비판이 헌정 질서의 혼란을 명분으로 헌재를 압박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보안법 폐지 등 열린우리당의 4대 입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을 때 또다시 헌재가 위헌 결정을 내릴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싶었을 것이란 해석이다. 한나라당을 겨냥한 측면도 거론된다.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자신의 손으로 통과시킨 법안이 위헌 판정을 받자 환호하고 표정 관리에 돌입하는 본질적 모순만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려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최근 4대 입법안이 위헌이며 필요하면 헌재의 위헌 판단이 필요하다는 뜻을 드러냈다. 청와대와 여권 핵심 사이에선 노 대통령의 정체성을 반영한 주요 입법과 정책이 좌절되면 조기 권력누수 현상이 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이 이번 사태의 논쟁에 직접 뛰어 든 모양새가 되면서 헌재 결정의 찬반 논란이 사회적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크다. 이 때문에 노 대통령이 여권과 지지층의 긴장도와 결집력을 높여 위기 상황을 돌파하려는 의도라는 해석도 나온다.

◆"대통령이 헌정질서 혼란의 장본인"=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는 "최고 헌법심판 기관의 결정을 승복하지 않고 나라를 어디로 이끌고 가겠다는 것이냐"면서 "헌정질서를 어지럽힌 장본인은 노 대통령 자신"이라고 주장했다.

남경필 원내수석부대표도 "지난번 헌재의 탄핵 결정은 환영한다더니 이제 와서 쓰면 뱉겠다는 심산이냐"며 "헌재의 존재 의미는 입법권에 대한 견제이며 견제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대통령이 법치주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증거"라고 말했다.

전여옥 대변인은 "노 대통령은 왜 국회의 권능이 상처를 입고 본인을 비롯한 정치권 전체가 신뢰를 잃었는지 되돌아 봐야 했다"며 "그것은 대통령이 밀어붙인 온갖 개혁이 이 나라를 뿌리째 흔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헌법재판소 반응=헌재 관계자는 "입법권의 남용을 견제하라고 둔 기관이 헌법재판소 아니냐"며 "헌재가 경종을 울린 데 대해 같은 헌법기관인 대통령이 나서서 공개비난하는 것이야말로 헌정 질서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최훈.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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