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지식인 지도] 크루그먼과 국제무역 새로 읽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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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고전적인 국제무역론은 국가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무역을 한다고 가르쳐 왔다.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영국의 경제학자)는 국가간의 기술차이에서 무역의 발생원인을 찾았고, 노벨상을 받은 '헥셔-올린 정리(定理)' 는 노동과 자본의 부존량이 국가별로 다르기 때문에 무역이 발생한다고 했다.

또한 이들 고전파 국제무역이론은 이렇게 발생한 무역이 교역국 모두에 이익을 준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즉 프랑스는 독일보다 멕시코나 브라질에서 더 많은 무역의 기회와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이러한 고전파 국제무역이론에 대한 불만이 경제학 안팎에서 고조된 시기였다. 경제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무역의 폭발적인 증가가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서가 아니라 기술과 생산자원의 부존량이 아주 비슷한 선진국간의 무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이와 더불어 많은 경제평론가들은 '일본 현상' 에 주목했다. 그들에 의하면 일본은 경제학이 그렇게도 역설해 왔던 자유무역과는 반대로 갔기 때문에 성공한 나라였고, 미국은 우매하게도 이 일본과 자유무역을 함으로써 손해를 보는 나라였다. 또한 그들은 규모의 경제나 독과점산업의 존재를 무시한 고전적 자유무역주의는 현대 경제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선진국간 무역증대 주목

이러한 상황에서 폴 크루그먼(48)은 호주 출신의 켈빈 랭카스터(1924~99.미 컬럼비아대 교수 역임), 인도 출신의 아비나시 딕시트(미 프린스턴대 교수) 등과 함께 독립적으로 새로운 무역이론을 개발했다. 이들은 모두 상품차별화와 규모의 경제라는 두 현상에 주목했다. 소비자들은 취향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종류의 상품이 시장에서 공급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기업들이 지나치게 많은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게 되면 각 종류의 상품에 대한 판매량이 너무 작게 되고, 이는 규모의 경제가 심각한 산업에서 생산단가를 급증시켜 적자를 유발한다. 따라서 시장에 공급되는 상품의 종류는 소비자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와 규모의 경제간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시장의 크기에 제한받게 된다.

국제무역은 이러한 긴장을 완화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무역으로 인한 시장의 확대는 생산자들이 규모의 경제를 더욱 활용할 수 있게 해주며, 소비자들은 국산품과 수입품을 통해 선택의 범위를 확대하게 된다.

이렇게 소비자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와 규모의 경제로 인해 발생하는 무역은 기술과 생산자원에서 거의 차이가 없는 프랑스와 독일간에도 빈번히 이뤄진다. 따라서 새로운 국제무역이론은 무역의 급속한 확대가 주로 선진국 시장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크루그먼은 새 무역이론을 가지고 많은 제조업 분야에서 자국시장의 크기가 큰 나라가 우위를 확보하는 현상, 선진국간의 무역은 대부분 산업내 무역이라는 사실, 급속한 무역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소득분배의 문제가 심화하지 않았다는 점들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동료인 이스라엘 출신의 엘하난 헬프먼(미 하버드대 교수)과 함께 새로운 무역이론과 고전파 무역이론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고 규모의 경제와 독과점 하에서 고전적 자유무역주의가 어떻게 수정되거나 확대돼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는 이외에도 국제경제학의 전 분야에 걸쳐 수많은 공헌을 했다. 지나치게 팽창적인 통화정책이 고정환율을 붕괴시키는 과정을 보여준 그의 박사논문은 외환위기를 설명하는 많은 모형들의 초석이 됐으며, 이어 그는 유럽식 환율제도의 작동원리, 엔-달러 환율 변동성의 증가 원인을 밝히는 영향력 있는 국제금융이론을 개발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도시의 형성과정과 산업의 입지를 설명하려는 '경제지리학' 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크루크먼이 진짜 유명하게 된 것은 이러한 노벨상급 학문적 공헌이 아니라 90년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경제평론가로서의 활동 때문이었다. 그는 어설픈 보호무역주의로 무장하고 일본을 공격하는 평론가와 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을 즐겼다. 이어 평론 대상을 경제학의 전 분야로 확대해 주류경제이론에 입각하지 않은 많은 통설에 신랄한 공격을 가했다.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산업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는 라이시 미 노동부장관은 생각이 짧은 정책사업가이며, 과거 소련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했던 것처럼 이제는 일본이 미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일 무역전문가 프레스토위츠는 기름장수라고 했다.

당시 MIT에 함께 있었던 레스터 서로 교수와는 여러 분야에서 논쟁을 벌였는데 특히 미국 노동자의 임금이 저임금국과의 무역으로 인해 낮아졌다는 그의 주장을 경제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국가간의 무역을 전쟁처럼 여기는 그의 이론들을 사이비 경제학으로 간주했다.

***보호무역주의 신랄 비판

이러한 적극적인 평론활동은 독설가로서의 그의 이미지를 굳혔고, 이는 그가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수석으로 발탁되지 못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평론활동은 미국 언론의 보호무역적 성향을 약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그는 일반대중에게 경제학을 소개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상식의 대부분이 엉터리라는 것을 밝히는 책들을 연이어 출간했다. 이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그를 세계에서 유명한 경제학자로 만들었고 그의 홈페이지(http://web.mit.edu/krugman/www/)는 웬만한 학술지와 신문의 위력을 갖게 됐다.

흔히 사람들은 그의 평론이 그가 개발한 독특한 이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론은 학부생도 이해하는 경제원론을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94년 '아시아 기적의 신화' 라는 글에서 기술발전이 미약한 한국과 싱가포르는 곧 고도성장을 멈출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글로 그는 우리 나라에서도 일약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예측도 수확체감의 법칙이라는 경제학의 기본원리와 다른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또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글이 아시아 외환위기를 예측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예측의 단호함과 아시아 신생공업국들을 망한 소련에 비유하는 독설이 충격의 파장을 확대시켰다.

일본 침체의 원인을 과잉투자 붕괴에 의한 투자감소와 과잉저축에서 찾고 소비를 자극시키는 과감한 통화정책을 권고한 그의 처방도 케인스 경제학의 교과서적 적용이었다.

송의영 서강대교수.경제학

<폴 크루그먼은 누구…>

▶1953년 미국 뉴욕 출생

▶74년 예일대 졸업

▶77년 MIT 경제학 박사

▶77~79년 예일대 교수

▶79~94년 MIT 교수

▶82~83년 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

▶94~96년 스탠퍼드대 교수

▶97~현재 MIT 교수

▶91년 미 경제학회가 주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 수상

<관련 저작들은…>

<번역서>

▶경제학의 향연(부키, 97년)

▶팝 인터내셔널리즘(한국경제신문사, 97년)

▶불황경제학(세종서적, 99년)

<미번역서>

▶시장구조와 해외무역(87년)

▶통화와 위기(92년)

▶지리와 무역(93년)

▶발전과 지리, 경제이론(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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