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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읽기] 끝없이 이어지는 외국방송 표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지금은 동서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연식 교수 역시 이른바 프로듀페서(PD 출신 교수)다.

그가 장문의 편지를 보내 왔다. 평소 밝은 성격인데 그 날의 내용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을 방불케 했다.

그를 비분강개하게 만든 건 지난 월요일(3월 12일) 저녁에 KBS2에서 방송한 '신춘특집 퀴즈정글' 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을 보다가 도저히 열이 올라서 참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진행방식이나 세트디자인, 조명, 음악 모두 자신이 영국에서 즐겨 보던 'The Weakest Link' (BBC 제작)를 고스란히 옮긴 것이었다. 그래놓고는 단 한 마디도 이 프로그램의 '출처' 를 밝히지 않는 걸 보고 분노와 수치심에 몸을 떨었다는 것이다.

표절이 방송계에만 있는 건 아니다. 교수 사회에서도 '누구 누구는 표절의 대가' 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안다. 표절은 그 말 자체가 도둑질이라는 뜻이다. 번역이나 번안을 해 놓고도 출처를 밝히지 않으면 그건 비양심적 행위다.

남들이 힘들여 연구한 것이나 독창적 견해를 마치 자신이 만들어 낸 것처럼 위장하고 은근슬쩍 넘어가는 건 사기범이나 도굴전문가의 처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알 만한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끝까지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다. 잘못된 걸 뻔히 알면서도 귀찮아서, 혹은 불쌍해서 눈감아 준다면 그 일 역시 범인 은닉죄에 해당하지 않을까.

방송도 마찬가지여서 프로그램을 보다가 '어디서 저런 기발한 아이디어를 개발해 냈을까' 하며 감탄했는데 시간이 지난 후 누군가 외국 것을 그대로 베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그때 느끼는 배신감은 마치 도둑의 물건을 헐값에 산 장물아비의 느낌과 다를 바 없다.

최근 청소년들에게 인기를 끈 MBC 미니시리즈 '맛있는 청혼' 의 표절 혐의를 전해 듣고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베끼기는 받아쓰기보다 더 먼저 치르는 학습의 단계인데 고작 거기에 머물면서 전문가랍시고 행세하는 건 몰염치하다.

표절의 이유는 간단하다. 창의력은 부족한데 경쟁심은 넘친다. 자존심과 도덕성은 뒷줄로 밀린다. 그러면서도 전문가 행세를 해야 하는 그의 처지 역시 고단할 것이다. "베끼면 어때. 재미있으면 됐지" 라고 말을 끝내서는 안 된다. "이 재미는 제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분께 감사 드립니다" 라고 낮은 자세로 고백해야 한다.

말로 끝낼 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이니 고마움의 뜻을 돈(로열티)으로 지불하는 게 도리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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