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순환 거듭 일본경제… 세계 금융 발목잡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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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문으로만 나돌던 일본의 3월 위기설이 실체를 드러내는 것일까. 이달 말 결산을 앞두고 주가가 폭락하고 이것이 은행과 기업의 경영을 악화시켜 부실 채권이 늘어나는 악순환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불안정한 세계경제의 진원지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커지는 금융 불안=일본 금융청이 올 초 공식 집계한 은행권의 부실 채권은 31조6천2백억엔에 달한다. 총 대출금의 6.4%다. 보험.신용금고 등 제2금융권을 합치면 60조엔에 달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것이 금융기관의 발목을 잡고 있어 일본은행이 아무리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어도 정상적인 금융기능이 되살아나지 않고 있다.

주가 폭락도 은행 경영에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경제전문지 다이아몬드의 시산(試算)에 따르면 니혼고교.다이이치간교.후지.야스다신탁은행이 통합해 새로 출범한 미즈호그룹의 경우 닛케이 평균 주가가 11, 000엔으로 밀리면 평가손이 무려 1조2천70억엔에 달하게 된다는 것. 스미토모.사쿠라은행이 통합한 미쓰이스미토모은행도 주가가 12, 500엔이면 2천5백38억엔, 11, 000엔이면 6천6백66억엔의 평가손을 낼 것으로 분석됐다. 이것이 결국 은행의 신용등급을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 눈덩이 재정 적자=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등의 공공 부채가 6백조엔에 이르고 있다. 4년 뒤에는 국채 잔고가 지금보다 1백20조엔이나 많은 4백83조엔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 때문에 재정에 의한 경기 부양책을 동원할 여지가 별로 없다.

더 큰 문제는 국채 발행이 자꾸 늘어남에 따라 소비와 투자가 위축된다는 것이다. 일본 소비자들은 재정 적자로 장래 세금이 늘어날 것이라는 판단으로 저축을 늘리고 소비를 줄이고 있다. 이 때문에 민간 주도의 자율적인 경기 회복에 제동이 걸리고 있다는 것이다.

◇ 떨어지는 엔화 가치=일본 경제에 대한 실망감이 엔저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으며 일본 정부도 이를 굳이 막으려 하지 않고 있다. 일단 엔저가 돼야 경제의 큰 축인 수출이 살아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15일 도쿄(東京) 외환시장에서 엔화 가치는 달러당 1백20.61엔으로 전날보다 0.74엔 하락했다.

그러나 여름을 고비로 다시 엔고로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의 잇따른 금리 인하로 미.일간의 금리 격차가 줄어든 데다 부시 정권 내에서 대일 무역적자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일본은 불황에 엔고가 겹치는 이중고를 당하게 된다.

◇ 긴급 경제대책 왜 안 먹히나=지난 9일 연립여당이 내놓은 긴급 경제대책은 주가를 떠받치기 위한 대증요법적 성격이 짙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예컨대 민간의 출자를 받고 정부가 보증을 서는 주식매입 기관의 경우 은행.기업.정부 모두에 추가 부실을 안겨줄 위험이 있다.

◇ 일본 정부의 복안은〓금융당국은 위기 조짐이 일어나면 즉각 공적자금을 투입할 태세다. 금융청은 4월부터 10조엔 이상의 '위기대응 자금' 을 재량껏 사용할 수 있도록 제도 정비를 마쳤다. 이에 따라 다음달 UFJ그룹으로 통합될 예정인 산와.도카이.도요신탁은행은 이달 말 결산 때 2천2백20억엔의 적자를 감수하고 1조엔의 부실 채권을 털어내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계기로 대형 은행들의 부실 정리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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