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딸들의 반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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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말 할 말이 없더군요. "

나름대로 평등주의자라고 자처해왔다는 그는 최근에 겪은 일을 털어놓으며 이렇게 끝을 맺었다. 언론사 기자인 그는 부음기사를 정리하다가 모친상을 당한 어느 상주(喪主)의 이름과 직함을 확인하느라 전화를 했단다.

*** 성차별한 종중재산 분배

마침 상주의 여동생이 전화를 받자 평소 지녀온 '평등성' 을 발휘해 남자형제들과 함께 그녀의 이름과 직함도 기록할 요량으로 물었단다.

물론 그녀의 남편도 함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갑작스레 상을 당해 경황이 없는 가운데서도 그녀는 묻지도 않은 새언니의 이름을 밝히며 함께 명단에 넣어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관례상 며느리의 이름은 쓰지 않는다며 곤란해하자 그녀는 "왜 저는 되고, 새언니는 안되나요? 어머니가 새언니를 얼마나 예뻐했는데… 언니 이름이 안들어간 것을 알면 무척 서운해하실 거예요" 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이유 있는 항변에 꼼짝없이 며느리의 이름까지 써넣을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자손이라곤 딸뿐인 가정에서도 부모 상을 당하면 딸은 명함도 못내민 채 사위의 이름으로 부음이 실리는 것이 통례였으니 정말 세상은 달라진 셈이다.

여기저기서 사회의 인습에 반기를 드는 '딸들의 반란' 이 일고 있다. 지금까지 당연시해오던 종중(宗中)의 개념에 집단으로 도전하는 딸들도 있다.

"종중은 공동 선조의 분묘를 유지하고 제사를 지내며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공동 선조의 후손 가운데 '성년 이상의 남자' 로 구성되는 자연적 집단" 이라는 대법원 판례가 근거가 돼 지방법원에서 잇따라 패소했지만 딸들은 조금도 기죽지 않고 '남녀 평등시대에 딸들도 후손의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 고 투지를 불태우며 고등법원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 기세라면 대법원은 물론 헌법소원까지도 불사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성주(星州) 이(李)씨 안변공 성복파 후손인 여성 26명, 청송(靑松) 심(沈)씨의 여성 7명, 용인(龍仁) 이(李)씨 일부 여성 등 종중의 수는 물론 가세하는 여성의 수도 점차 늘고 있다.

크게는 종중 재산분배에서 작게는 각 가정의 일상에 이르기까지 '딸들의 반란' 은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자 후손 인정 요구' 를 단순히 '돈 문제' 라고 치부해버리는 한 '반란' 의 본질을 알아내 평정을 꾀하기란 불가능해진다. 상주 명단에 며느리를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의 속내가 딸과 며느리의 차이가 아니라 며느리와 사위의 차별대접에 대한 항의라는 것 역시 눈치챌 수 없다.

여성들의 변화는 일반적인 물결의 파장과는 반대로 밖에서 안쪽으로 파고들며 점점 지름이 짧은 동심원을 그리고 있다. 사회의 구조, 직장에서의 불평등이나 성희롱 같은 일반적인 문제에서 점차 우리 가정의 문제로 좁혀지고 있는 추세다.

여성부의 전신인 대통령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지난해 11월에 내놓은 '21세기 여성정책에 대한 국민의식 조사연구' 결과를 보면 부부 사이라도 강제적 성관계는 강간으로 볼 수 있다는 여성이 그렇지 않다는 이들보다 더 많다.

*** 가족부터 변화 인정해야

특히 연령이 낮을수록 이에 동의하는 여성은 늘어간다. 이혼 후 자녀의 입적문제도 그렇다. 엄마든 아빠든 아이를 맡아 키우는 사람의 호적에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여성들은 절대적인 지지(80.6%)를 보내고 있다.

평등한 부부관계.가족관계에 대한 남성의식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여성들이 압도적다수다(84.4%). 이런 수치들은 이제 더 이상 '딸들의 반란' 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가정문제의 상당수는 여성과 남성의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남편과 아빠는 아버지 시대의 남성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아내와 딸들은 더 이상 어머니 시대의 여성들이 아니다. 상대는 달음박질하고 있는데 제자리 걸음만 걷고 있어서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십상이다.

달라지는 세상에서 변화를 이끌고 있는 주체는 나와 상관없는 다른 집의 여자들이 아니다. 그들이 바로 '사랑하는 내 딸' 임을 아빠가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딸들의 반란을 멈추게 할 첫 단추가 열리지 않을까.

홍은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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