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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공간1번지] 10. 숭례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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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주변을 휘감듯이 지나가는 수많은 차량과 분주히 주변을 오고 가는 사람들,도심의 고층 빌딩에 둘러 쌓여진 대한민국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으로 더 자주 불리는 숭례문,그리고 그 곳에서 만났던 장인들은 내 인생의 행로를 바꾸어 놓았다.그리고 40년간 내 마음 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1962년 나는 임천선생과의 인연으로 숭례문 해체·수리과정에 참여하게 됐다.군복무를 마친 나는 입대전 일하던 국립박물관에 자리가 없어 당시 문교부 문화재 보수담당이었던 임 선생의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그 때 임 선생이 숭례문 해체·수리작업의 책임을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공사에 참여하게 됐다.

첫 인연을 맺을 무렵 문은 이미 해체되어 있었다.낡고 썩은 목재를 새롭게 교체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도편수(목수중 우두머리) 조원재씨의 지휘 아래 부편수 이광규씨가 대목들을 거느리고 재목 다듬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대의 장인들이 다 모였다.정통기법을 어김없이 구사하는 그 분들은 각각 자기 분야의 달인들이었다.무엇보다 기억에 뚜렷한 달인은 ‘방 노인’이라 불리던 목수다.

그는 마음 내키면 기장이 5m를 넘는 재목을 대자귀로 다듬으면서 종이장처럼 얇게 걷어내는 작업을 한 번도 중간에 끊어지지 않게 완성시켰다.거의 신기에 가까운 손길이다.

수더분한 모습에 키는 작달막했고,빙긋 웃는 얼굴이 동안(童顔)인데 말수는 아주 적어 하루 종일 몇 마디면 족했다.

고등학생이던 나를 처음 한국문화와 만나게 해준 국립박물관 미술과장 최순우 선생은 늘 우리 과원들에게 말을 헤프게 하지 말라고 훈계하시곤 하였다.그 분의 표현에 의하면 ‘언어경제학’을 준수하라는 말씀이셨고 당신도 실천 하셨다.

오랜만에 경주박물관 진홍섭 관장이 오시면 그렇게 반가워하면서도 수인사하고는 마주 앉아 서로 바라다만 보고 있다가 어쩌다 씩 웃는다.점심 이후 저녁까지 그런 분위기가 지속된다.진 관장님은 워낙 말수가 적어서 수묵(守默)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방 노인과 있으면 나도 그런 경지를 맛본다.일을 하다가 지켜보고 있는 나와 눈이 맞으면 씩 웃는다.어린아이의 티 없는 웃음이다.나는 그 분이 그렇게 좋았다.

6.25때 직격탄을 맞은,홍예(무지개 모양)가 있는 화강암으로 쌓아올린 육축을 해체수리 하는 일의 감독 책임이 나에게 떨어졌다.공술(工術)책임자는 ‘곰보’라는 별명의 김천석 선생.그는 드잡이다.

무거운 것 나르거나 쌓거나 헐어내는 일이 전공이다.김선생은 작업 중에 서툴고 위태롭게 일하는 이가 눈에 띄면 밀쳐내고 손수 지렛대질을 했다.아주 가볍고 쉽게 하면서도 전혀 무리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다루는 방법과 다르며 그렇게 하는 일이 전형으로 느껴져 일을 지켜보다 깜짝깜짝 놀라곤했다.

당시는 기중기나 지게차가 없던 시절이라 사람 힘으로 무거운 것을 달아 올렸다.어디에 어떻게 도르래를 설치하고 잡아 당기느냐에 따라 무겁게도,거칠게도,가볍고 간단하게도 처리되는데 그의 지휘에는 빈틈이 없었다.그러면서도 자기는 옛 분에 비하면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며 늘 한탄하곤 했다.

기와 잇는 기선길 선생도 달인답게 일에 투철했다.숭례문 2층 지붕에 올라가면 아찔할 만큼 높고 지붕 경사도 급하다.서툰 사람은 기와 골에 올라서기조차 어렵다.발이 붙지 않는다.그런 곳에 기와 잇는 일이 쉬울 리 없다.

후에 금산사 미륵전,화엄사 각황전 같은 대규모 건물 지붕 보수에 그 분 모시고 가서 일 하면서도 느꼈지만 대단히 치밀하고 활달하여서 그 분이 이은 지붕은 가지런하기가 ‘참빗으로 빗은 여인의 머릿단’ 같았다.지금도 간혹 어설픈 기와지붕을 보면 그 분 생각이 절로 난다.

숭례문 수리가 끝난 뒤 나는 한옥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이광규 ·김천석 ·기선길 선생외에,단청의 한석성 선생 등을 모시고 전국 국보 ·보물 등 중요건축물 응급수리에 참여했다.

초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장이 된 진홍섭 박사의 뜻이 큰 힘이 되었다.“당대 최고의 장인들에게 문화재의 복원을 전임한다”는 박사의 취지에 공감한 나는 최고의 장인들과 전국을 누볐다.

그렇게 10여년을 지내면서 작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당시엔 한옥을 공부하는 사람도 없고,한옥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은 더더욱 없던 시절이었다.전국으로 다니며 집 구경하고는 돌아와 글을 쓰곤 하며 오늘에 이르렀는데 어언 40년이 넘었다.

숭례문에서 장인들과 그들의 손길에 반하여 휩쓸려든 길에서 세월을 지내다 보니 자연 얻어들은 풍월이 쌓였다.그것을 타 털어놓고 죽어야 저승길이 가볍다고 윽박지르는 후배들 등쌀에 지금은 있는 것 털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숭례문에서 만났던 옛분들과 비교해 ‘족탈불급’일지라도.

요즘은 강남에 문을 연 한옥문화원(http://www.hanok.org)에서 한옥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다.

함께 한옥을 탐구한 분은 물론,사진작가 김대벽씨 같은 분들과 더불어 집에 담긴 문화에도 관심을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집 자리인 ‘터잡기’의 문제도 큰 관심거리다.

궁금한 것이 있는 문화인들이 모여들고,학생들이 찾아온다.그들이 집의 실수요자이고 집 지을 실무자들이다.그들과 함께 오늘의 집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

밤에는 직장에 다니는 전문인들이 모여 아주 진지한 토론을 한다.대학원처럼 2년 과정으로 꾸준히 탐색하기로 하고 모여 앉았다.그 동안 축적된 자료를 다 불살라 그 재를 나누어 먹자는 각오다.아마 이 탐구가 끝나면 나의 저승 가는 길은 아주 가벼워질 것이다.

이제는 무작정 남의 것 따라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내 것을 제대로 알고 남의 것을 배워야 앎의 균형도 잡히고 시야도 넓어지지 않겠는가.

요즘은 서민들이 지을 수 있는 한옥에도 관심을 가져달라는 볼멘 소리를 많이 듣는다.그래서 실험을 하고 있다.집 짓고 싶다는 분과 그런 집 짓는데 참여하고 싶다는 실습 지망생을 서로 만나게 하여 두레 집을 짓도록 시도해보자는 생각이다.21세기에 맞는 한옥을 짓는 일이 목표다.

한옥문화원에는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싶다는 희망이 쌓이고 있다.평생을 한옥에 연관된 일에 바쳐온 분들도 한 팔 거들겠다고들 나섰다.자기성취의 사회 환원이랄 수 있다.

이 일이 잘만 되면 우리도 우리 정서에도 맞고,오늘날의 생활 양식에도 맞는 멋들어진 한옥을 한 채 지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들이다.

나도 한옥을 한 채 지어 살고 싶다.나는 아직 그런 집을 갖지 못하였다.한옥 탐구에 정신이 팔려 살다보니 돈 벌 일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할 일은 더 있다.그 중 하나가 장인열전(匠人列傳)의 정리와 집대성이다.숭례문에서 만난 그런 분들이 우리에게 문화의 유산을 남긴 주인공들이다.그런데도 그 분들에 보답하는 고마움이 우리에게는 없다.하다 못해 어디 걸맞는 자리에 비석이라도 새겨 문화의 기반을 이룩한 노고에 답했으면 싶다.

누가 알세라 감싸쥐고 쉬쉬하던 일인데 이렇게 다 털어놓아도 되려는지 잘 모르겠다.이왕 말문을 연 바이니 다 털어놓았는데,혹시 최순우 선생께서 언어경제학의 교훈을 어겼다고 저승에서 야단치지나 않으시려는지….

어린 시절 멋모르고 맺은 숭례문과의 인연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덕분에 참 정신 없이,열심히 살았다.더러 숭례문을 지나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쳐다보는 눈길이 조심스럽다.별 일 없는가?

신영훈 <목수>

<신영훈 약력>

▶1935년 경기도 개성 출생.

▶55년 서울 중앙고등학교 졸업.

▶62년 문화재관리국 전문위원.

▶67년 멕시코시티 한국정 건립단장.

▶78년 부산시립박문관 학예연구실장.

▶84년 송광사 중창공사 감독관.

▶목수.한옥문화원장.해라시아문화연구소 대표.

▶저서=‘한옥의 향기’ ‘우리 한옥’ ‘한옥의 고향 ’‘우리문화 우리유산’ ‘한옥의 미학’ ‘한옥의 조향’ ‘한국의 살림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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