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민영화 '후유증' 줄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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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던 정주영 현대 전 명예회장은 박태준 전 포철회장과 철(鐵)에 얽힌 악연(惡緣)이 있다.

鄭전명예회장은 평소 제철소를 하나 갖고 싶어했다. 자동차.중공업 등 철강제품을 많이 쓰는 계열사들이 정부의 독점기업인 포철에 굽신거리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는 1977년 현대종합제철을 세우고 78년 인천제철을 인수하면서 꿈을 키웠다.

포항제철처럼 번듯한 일관제철소를 평택에 지으려고까지 했다. 이 계획은 박태준 당시 포철사장에 의해 좌절됐다. '현대제철소' 는 포철의 경쟁상대가 될 게 뻔했다. 그는 재벌의 문어발 확장에 반대한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했고, 정부는 "두 제철소가 보완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며 제2제철소(광양)도 포철에 줬다.

YS정권 들어 朴전회장이 몰락하자 현대는 다시 기회를 노렸다. 94년 7월 "제3제철소를 짓겠다" 고 나선 것이다.

이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鄭전명예회장이 한때 정치에 뜻을 두었던 외도가 화근이었다. '재벌의 공룡화' 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가 동원됐지만. 그 뒤로도 현대와 포철의 갈등은 틈만 나면 불거졌고, 포철은 독점하고 있는 철강제품의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현대를 항복시켰다. 한동안 잠잠한가 싶던 철강싸움이 요즘 다시 살아나 몇달째 계속되고 있다. 민간기업으로 탈바꿈한 포철은 유상부 회장이, 현대는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대를 이은 셈이다.

이번 2라운드에서 현대는 포철에서 공급받던 자동차용 냉연강판 중 일부를 계열사 현대하이스코(옛 현대강관)에서 구입하겠다고 했다. 포철은 냉연강판의 원료격인 핫코일(열연강판)을 현대에 대줄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정부까지 중재에 나섰으나 포철측은 "민간기업인데 정부가 웬 참견이냐" 고 면박을 줬다.

싸움의 본질이 달라졌다. 옛날에는 '민간재벌' 과 '정부재벌' 이 싸웠으나 지금은 순수 민간 싸움이다. 그러면서도 자유경쟁의 시장원리가 안통하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포철을 민영화하면서 독점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산업자원부 관료들도 "시한에 쫓겨 서두르다 보니 심도있게 검토하지 못했다" 고 시인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98년 11월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분리해 매각하는 방안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낸 적이 있다. 분리를 안하면 민영화해도 '국가독점' 이 '개인독점' 으로 변할 뿐 독점의 폐해를 고칠 수 없다는 지적이었다.

이 주장은 산자부와 포철의 반발에 부닥쳐 빛을 보지 못했다.

포철은 자동차.조선.전자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강재의 55~60%를 댄다. 핫코일은 92%나 된다. 민간기업이라지만 기초소재의 공급독점은 공기업 시절과 다를 게 없다. 정부가 거대공룡을 키워 그대로 시장에 풀어준 꼴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겪고 있는 전력비상사태도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96년 민영화한 전력회사들이 채산이 안맞는다며 생산을 줄인 데서 전력난이 비롯됐다고 한다. 공공성이 강한 전력을 민간이 관리할 때 어떤 불씨가 생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철강, 미국은 전력 부문에서 민영화의 후유증을 앓고 있다. 한국통신.가스공사.한국전력의 민영화가 줄줄이 대기 중이다. 민영화가 경제개혁의 핵심처럼 돼 있지만 민영화 이후를 꼼꼼히 챙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

이종태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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