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회의 조건부 지원은 조잡한 행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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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와 한국작가회의가 올해 지원금 3400만원을 두고 정면 충돌했다. 올 초 예술위가 작가회의에 2월 초까지 ‘확인서’를 제출토록 요구한 게 화근이었다. 예술위는 작가회의가 불법시위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해야 돈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작가회의는 즉각 반발했다. 지난달 20일 총회를 열어 지원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 <본지 2월 22일자 29면>

평론가 김병익씨는 “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금을 빌미로 예술가로부터 뭔가 보장을 받아내려는 상황이된 게 안타까워 개인 돈을 내놓게 됐다”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이날 총회에서 익명의 70대 문인이 3400만원을 내놓은 사실이 알려졌다. 사재를 턴 것이다. 이 문인은 평론가 김병익(72)씨인 것으로 밝혀졌다. 4·19 세대인 김씨는 문단의 원로다. 1975년 평론가 김치수·김주연, 고(故) 김현 등과 함께 출판사 문학과지성사를 설립한 이른바 ‘문지 4K’ 중 한 명이다. 예술위가 관 주도의 문예진흥원에서 벗어나 민간자율기구인 현 체제로 출범한 2005년 초대 위원장도 맡았었다. 요즘 예술위는 ‘한 지붕 두 위원장’ 체제로도 골머리를 앓고 있다. 5일 오후 서울 서교동 문학과지성사 사무실에서 김씨를 만났다.

-왜 돈을 내놓게 됐나.

“초대위원장으로서 첫 단추를 잘못 꿴 거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작가들이 굴욕감을 느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미 약속된 외국 작가와의 교류사업을 못하면 국가 체면에도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올 예산은 어떻게든 마련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술위의 확인서 요구를 어떻게 보나.

“문화적인 사회에서 생각할 수 없는 조잡한 행위다. 문화예술 정책은 기본적으로 경의와 존경의 바탕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 지원하는 쪽과 받는 쪽 사이에는 안 그래도 미묘한 심리적 갈등 있기 마련인데 그걸 이용해 심리적 장악까지 하려는 것은 아주 못마땅한 태도다.”

-예술위가 독립적이라고 보나.

“문예진흥원을 예술위로 바꾼 것은 순수 민간기구로 만들어 정부의 감독과 평가는 받되 구체적인 사업은 독자적으로 하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예술위 출범 후 이런 방침이 흔들린 것 같다. 지금은 문화부 예속기관처럼 돼버렸다. 위원 구성도 문제다. 예술인으로만 채우면 각자 장르 이기주의에 빠져 문화 전반을 바라보는 공익적인 시선이 미약해진다. 학계·경제계·법조계·언론계 등 여러 부문이 참가해야 한다고 본다.”

-예술위는 왜 독립적이어야 하나.

“문화예술 지원은 민간이 다양한 인식과 관점에서 해나가야 활기찬 성과가 나올 수 있다. 예술의 전제는 자율성이다.”

-한 지붕 두 위원장 체제가 한 달이 넘었다.

“어려운 문제다. 전 위원장이든 현 위원장이든 일종의 공익적 결단을 내려 스스로 사퇴하는 건 어떨까 싶다. 두 위원장은 각각 진보·보수 세력을 대표해 맞닥뜨리고 있는 것 같다. 예술에는 이데올로기가 개입되게 마련인데 작품을 통해 나타나야지 현실적 이익을 탐내게 되면 치사해진다.”

김씨는 인터뷰 내내 돈 내고 생색 내는 식으로 비칠까 걱정했다. 과거 몸 담았던 예술위에 대한 비판도 제살 깎아먹기 식으로 여겼다. 하지만 차분하고 분명하게 입장을 밝혔다. 지금 같은 파행운영은 그 어느 쪽에도 득이 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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