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또 미뤄진 돈세탁방지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돈세탁방지법안의 국회 통과가 또 늦춰지고 있다. 이 법안은 9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법안 적용 대상에 정치자금을 포함시키기로 하면서 한때 급류를 타는 듯했지만 이날 오후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의원들이 "권력에 의해 악용되는 것을 막을 보완장치가 필요하다" 고 반발하면서 미뤄졌다. 결국 李총재도 의원들의 의견을 수용, 보완책 마련을 지시했다고 한다.

여야간 합의된 국회일정은 지난 주말로 끝나버렸고 이제 의원들의 외유를 더 이상 붙잡고 있을 수도 없다고 하니 당분간 법안처리는 힘들게 됐다.

더구나 9일 여야가 법안에 정치자금을 포함시키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여야를 막론하고 상당수 의원들이 법안 통과에 협조하지 않기 위해 국회를 떠나버렸다니 한심한 일이다.

의원들이 돈세탁행위 처벌대상에 정치자금을 포함시키는 데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이유는 '검은 돈' 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법안이 통과되면 정치자금을 가.차명 계좌로 관리할 수도 없게 되며 정치자금을 세탁한 정치인과 협조자도 처벌된다.

물론 법이 특정 정치인에 대한 표적사정이나 야당 탄압에 악용될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야당 의원들의 보완책 마련 요구가 이해는 간다.

그러나 불법 정치자금 제공과 이에 따른 정경유착의 고리를 이제 끊어야 한다. 정치자금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받는다면 거리낄 게 있을 턱이 없다.

국회 재경위에서는 여야 의원들이 한통속이 돼 정치자금과 탈세 부분을 법안 적용 대상에서 제외했지만, 법사위에서 제동이 걸릴 수 있었던 것은 정치부패가 이제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최근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에 정치권을 질타하는 편지와 함께 오물이 배달된 것도 국민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위험수위를 넘었음을 보여준다.

말하기조차 역겨운 사건이지만 오히려 상당수 국민이 "속 시원하다" 고 말할 만큼 정치가 폄하되고 있는 상황을 직시한다면 반부패 법안들을 조속처리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