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종길 '춘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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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자대학은 크림빛 건물이었다.

구두창에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

파릇한 보리밭 …

어디서 연식정구(軟式庭球)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

언덕위에선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재거리고 있었다.

- 김종길(1926~) '춘니(春泥)'

춘니(春泥)란 '봄에 얼음이 녹아 질척 거리는 흙' 이라는 뜻이다. 시인은 한마디로 '봄' 의 의미를 '질척거리는 흙' 으로 상징시킨다. 이 시에서는 물론 제 2행의 '구두창에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는 진술에 나타나 있다.

꽁꽁 얼어붙은 흙에서 무슨 생명이 자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봄이 생명의 계절이라면 그 생명이 자랄 수 있는 토양, 즉 얼음이 녹아 질척해진 흙이야 말로 봄의 본질임을 알 수 있다. 발랄한 소녀들의 재잘거림, 파란 보리밭, 탄력을 받아 튀는 정구 공, 하늘로 높이 솟는 종달새 등 부차적인 이미지들 역시 모두 '춘니' 의 이 생명력에 관련된 것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세영(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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