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중국 이전의 옛 중원 땅은 동북아 문명의 공동무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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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을 기리는 사당을 허베이성에 세운 게 한·중이 수교한 1992년이다. 『요하문명론』의 저자 우실하 교수에 따르면, 예전 중국인은 염제·황제의 자손(炎黃之孫)이라고 자부했을 뿐 치우에 관심 없었다. 한국인이 치우를 높이기 시작하자 그마저 자기조상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그게 중국이다. 56개 민족을 하나로 묶으려는 현실정치의 필요성 때문에 까마득한 신화시대부터 중국은 통일된 단일문명이었다고 강변한다. 최근만이 아니다. 다른 지역, 다른 문명권을 대표하던 신화를 끌어들여 ‘메이드 인 차이나’로 만드는 노력은 『사기』의 사마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영토를 통일한 사람은 진시황이지만, 문명으로서의 중국을 ‘발명’한 첫 인물은 사마천이라고 해야 옳다. 그런 통찰은 동양철학자 김시천에게서 나왔다. “우리가 말하는 중국은 진나라·한나라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자·한족도 없었고 무수한 나라, 무수한 사람들이 혼재했다. 지금 쓰는 의미의 중국이란 『사기』 이후 성립된다.… ‘중국적인 것’의 실체가 애초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철학에서 이야기로』)

『사기』야말로 중국과 비(非)중국을 구분한 첫 역사책이다. 그럼 중국의 발명 이전의 중국사를 어떻게 봐야 할까? 다양한 세력과 문화가 펼쳐지던 ‘열린 장소’라고 주장한 이가 신화학자 정재서다. “고대 중국은 세계의 무대였다. ‘무대’라는 표현에 주의하자. 그곳은 누구든 자신의 작품을 들고 가 상연하던 열린 장소였지, 한 개인이 모노드라마를 상연하던 장소가 아니었다.”(『동양적인 것의 슬픔』) 요즘 이 견해가 대세다. 독일계 학자 에버하르트도 4000년 내내 자기동일성을 유지해온 중국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거대한 픽션이라고 지적했음을 기억해두자.

이제 우리는 민족주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운 새 지평을 확보한 셈이다. 유가·도가를 포함한 제자백가(諸子百家)는 물론 그 이전의 신화세계까지 동북아의 공통 문화유산으로 봐야 옳다. 한 나라가 독점해서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은 진정 철부지 짓이다. 근대의 산물인 민족주의 잣대로 고대를 주무르는 땅따먹기 게임에 불과하다. 때문에 신화란 ‘영원한 제국’ 중국을 위한 장식품이 아니며, 한국만의 독선적 주장을 펼칠 이유도 없다. 문제는 문화전쟁의 기운마저 풍기는 현실인데, 그건 넓은 시야를 가진 한·중·일 지식인이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할 숙제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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