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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으로 그린 세밀 판타지, 비결은 “즐겨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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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즐겨라”였다. 여덟 살 아들과 놀아주는 시간, 밥 먹는 시간만 빼면 오전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줄곧 그림만 그린다는 ‘중노동’ 작가의 말치곤 의외였다. “내가 즐길 수 없는 일을 하면 쉽게 지친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영국 출신 일러스트레이터 애드리언 스미스(41). 그는 17세 때 세계적 게임업체 게임스워크숍에 보낸 스케치가 채택되면서 일러스트를 시작했다. 이후 전설적인 게임 ‘워해머’에 참여하면서 이 분야의 스타가 됐다.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워해머’는 워크래프트·스타크래프트 등 전쟁게임의 모태가 된 게임. 그는 20년 넘게 게임 일러스트와 그래픽노블(그림소설)등을 통해 판타지 분야에서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선보여왔다. 최근 한국콘텐츠진흥원(원장 이재웅)과 서울비주얼웍스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았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작품인 그래픽 노블 『다크 판타지』를 들고 있는 애드리언 스미스.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더라도 작업실을 넓히는 데 쓰겠다”는 타고난 작가다. [김경빈 기자]

◆“지금은 유명작가지만 어릴 땐 문제아”=내한에 맞춰 그래픽노블 『다크 판타지』도 출간됐다. 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긴 처음이다. 그림이 참 섬세하다. 100% 수작업이다. 드워프(소인)·오거(인간 형태의 괴물) 등을 연필로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게 스케치한 뒤 수채물감과 유화물감으로 연거푸 색을 입혔다. 한 장 한 장이 소중히 보관하고 싶은 맘이 절로 드는 ‘작품’이다. ‘수작업의 장인’으로 유명하지만, 특별히 수작업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작품 성격에 따라 컴퓨터로도 작업한다.

그가 판타지에 빠져든 건 수많은 ‘판타지 폐인’들이 그렇듯 역시나, J R R 톨킨 때문이다. “열한 살 때 바닷가로 가족여행을 갔는데, 그 곳에서 톨킨의 『호빗』을 읽게 됐어요. 놀라웠죠. 바로 이어서 『반지의 제왕』도 읽었어요. 그 나이에 이해하긴 어려운 작품이었지만, 규칙도 한계도 없는 판타지 세계의 매력에 흠뻑 취했죠. 나도 이런 세계를 창조하는 데 한 몫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아이 때부터 닥치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전 학창시절 문제아였어요. 수업은 안 듣고 만날 그림만 그렸으니까요. 부모님도 ‘그림만 그려 뭐할 거냐’고 못마땅해 하셨어요. 고교 졸업 후 벌목장에서 일을 했죠. 대학 갈 실력이 안돼서요. (웃음) 낮에는 나무 베고 나르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어요. 게임스워크숍에서 프리랜서를 찾는다는 걸 알고 악마와 괴물 스케치한 걸 보냈더니 곧 연락이 오더군요. 6개월 수습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일하게 됐죠.”

◆“천재가 아니라면 그리고 또 그려라”=지금은 일본 등 해외에서도 그림을 가르쳐달라고 찾아온다. e-메일이 쇄도함은 물론이고. ‘그림을 잘 그리려면 뭘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사실 제가 다른 작가들 만나면 늘 물어보는 질문인데…. (웃음)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그리고 또 그리는 수밖에 방법이 있나요. 상상력의 원천이 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런 건 없어요. 그림을 죽어라 그리다 보면 아이디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기는 거죠. 무엇보다 즐겨야 돼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이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쉽게 지치거든요.”

그는 3일 부천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국내 최초로 할리우드에 『프리스트』 판권이 팔린 만화가 형민우와 대담 시간도 가졌다. 7년 전 세계적인 만화콘텐트전시회인 ‘코미콘’에 갔을 때 한 잡지에 실린 그의 그림을 보고 반했던 형씨가 대담을 원했다고 한다. 형씨는 이날 여태껏 간직하고 있던 그때 그 잡지에 사인도 받았다. “형민우씨는 실력도 좋지만, 무엇보다 즐기면서 그린다는 게 작품에서 드러나요. 할리우드가 좋아하는 그림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이 나오면 남들도 좋아합니다.” 그에 대해 더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그의 e-메일 artist@adriansmith.co.uk로 물어보시길. 아마도 “즐겨라”라는 대답이 예상되지만 말이다.

글=기선민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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