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들이 말하는 '비자금의 경제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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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혹시 비자금 갖고 계세요?'

요즘 주부들의 비자금이 화제다. 최근 결혼정보회사 듀오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기혼남녀의 87.2%가 배우자 몰래 비자금을 갖고 있었다. 특히 평균 액수로 보면 여성이 남성의 4배나 된다.

여성전문포털사이트 팟지닷컴(http://www.patzzi.com)에서도 기혼 여성을 상대로 비자금 소유 여부에 대해 설문조사를 했다. 주부 네티즌 1천명 중 절반이 비자금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지난달 가정경영연구소 홈페이지(http://www.home21.co.kr)토론마당에서도 ‘아내의 딴주머니’를 주제로 열띤 논쟁이 펼쳐졌다.

비자금은 시각에 따라 생활의 작은 감동도,불화의 씨앗도 된다.

가정경영연구소 토론마당에 글을 쓴 주부는 "빠듯한 남편 월급을 쪼개기 어려워 가끔 생기는 현금을 모아 내 명의의 통장을 마련했다" 며 "비자금은 소소한 행복 연출을 할 수 있을 만큼만 모을 계획" 이라고 말했다.

교사인 주부 P씨(33)는 자신의 비밀 통장에 '나의 발전기금' 이란 제목까지 붙였다.결혼하기 전 모은 돈과 현재 월급의 일부를 비밀 통장에 조금씩 넣고 있다는 그는 "언젠가 여행을 하거나, 또 대학원(박사과정)에서 공부를 하게 될 때 '내 돈' 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쓰겠다" 고 말했다.

주부의 비자금은 생활 형편과 주부의 직업 소유에 따라 천차만별이다.한 번도 딴주머니를 가진 적이 없다는 한 주부는 “빠듯한 살림에 파출부를 해야 할 형편이라 비자금은 꿈에 불과하다”며 아쉬워했다.

비자금으로 서로 감동을 주고 받은 사례도 많다. "남편이 나 몰래 용돈을 모아 생일 때 진주 목걸이를 선물해 감동을 받았다" 는 주부가 있는가하면, "아내의 비자금 덕에 집안의 큰일을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는 남성도 있었다.

그러나 주부 박복남씨(51)는 비자금 조성에 반대한다.“어차피 가정 살림에 쓸 돈을 따로 모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박씨는 "모든 경제 지출은 남편과 의논한다" 면서 "가구 사는 것을 제외하고는 남편이 내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 편이라 문제가 없다" 고 했다.

비자금이 왜 필요한 걸까.많은 이들이 밝힌 첫째 이유는 심리적 안정감이다.돈이 없으면 왠지 위축되기 싶고,여유있으면 힘이 난다는 것.

결국 '그 돈이 그 돈' 일지언정 갑자기 필요한 일이 있을 때 깜짝 자금으로 쓸 수 있어 좋다는 것이다.

'친정 때문에' 라고 말하는 주부들도 적지 않다.

결혼 14년차라는 한 주부는 “친정 식구들 경조사에 돈이 들어갈 때마다 남편이 못마땅하게 생각한다”면서 “이런 일로 다투기 싫어 비자금을 마련해놓고 쓴다”고 털어놨다.

또다른 주부 역시 "효자인 남편이 시집을 챙기는 데는 열심이지만 친정에는 소홀하다" 며 "주부 입장에서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준비하고 있다" 고 덧붙였다.

전업주부들이 집안 살림에 많은 시간을 바치지만,가사를 비생산적인 일로 여기는 것도 문제다.

전업주부 K씨(35)는 "주부가 먼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고 말했다.

가정경영연구소 강학중 소장은 “비자금은 부부가 서로 결국엔 털어놓을 수 밖에 없도록 하거나 알게 되더라도 불쾌하지 않을 만큼 모으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부부가 서로 배려할 줄 안다면 가정에서도 투명 경영을 하는 게 좋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자신을 황씨 아저씨라 밝힌 한 남성은 "부부의 딴주머니를 '신뢰주머니' 라고 부르자" 고 제안했다.“부부의 비자금은 자신만이 아니라 부부의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그는 "부부가 서로 신뢰를 바탕으로 다소 자유를 용인해주는 지혜가 필요하다" 고 덧붙였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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