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신지역주의] 7. 벨기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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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브뤼셀 자벤템 공항에서 약 50㎞ 남쪽의 소도시 '루뱅 라 누브' . 역 앞에 펼쳐진 비슷한 생김새의 현대식 건물들이 이곳이 계획도시임을 알리고 있다.

간판.표지판들은 온통 프랑스어로 쓰여져 있고 역 주변의 건물들은 대부분 루뱅대의 강의실.연구실.숙소.부속시설들이다.

이곳에서 40㎞ 가량 북쪽으로 가면 '루뱅' 이라는 중세풍의 도시를 만난다.

이곳 도심에도 역시 루뱅대가 있고 꾸불꾸불 이어진 좁은 거리는 수백년 된 대학건물들로 채워져 있다.

40㎞ 거리를 두고 있는 이 두 루뱅대는 이름은 같지만 다른 대학이다. 그리고 벨기에의 지역주의 역사의 상징이다.

'새로운 루뱅' 이라는 뜻의 루뱅 라 누브시가 생겨난 것은 약 30년 전. 프랑스어를 공식언어로 사용하던 루뱅시의 루뱅대에서 60년대 후반 학생과 시민들이 벨기에 북부지역 언어인 플라망어로 강의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이자 본래 대학주인들이 아예 새 도시를 만들어 대학을 옮겨가 버린 것이다.

6백여년의 역사를 가진 벨기에 최고(最古)의 대학이 둘로 갈라져 있는 것처럼 이 나라는 사실상 둘로 나뉘어 있다.

북쪽에는 플랑드르 자치정부, 남쪽에는 왈롱 자치정부가 국방.외교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권한을 갖고 있고 두 지역에서는 각각 플라망어와 프랑스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수도 브뤼셀도 또 하나의 자치지역으로 이곳에도 플랑드르와 왈롱의회가 따로 있다).

양쪽 지방정부는 각각 해외에 무역대표부를 두고 있으며 연방정부의 각료자리는 헌법에 따라 양쪽이 똑같은 수를 차지한다.

1831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벨기에는 앤트워프.브루게시 등이 위치한 북쪽지역에선 주로 네덜란드어 계열의 플라망어를 사용하고 있고 리에주.나무르시가 있는 남쪽에서는 대부분 프랑스어계열의 왈롱어를 사용하고 있다.

언어만 다른 것이 아니라 남쪽은 라틴계, 북쪽은 게르만계에 민족적.문화적 뿌리를 두고 있어 관습과 생활방식도 구별된다.

기원전 4세기에 선조들이 '낮고 편평한 땅' 에 자리잡은 이 나라는 오스트리아.스페인.프랑스 등 이웃의 지배를 받으며 네덜란드와 공동운명을 겪었으나 17세기 네덜란드 신교도들이 스페인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구교전통을 유지하며 독립적인 국가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그리하여 북쪽에는 네덜란드와 언어 및 민족적 뿌리가 같지만 종교가 다른 주민이, 남쪽에는 프랑스와 언어 및 종교가 같지만 문화적으로는 프랑스와 구별되는 주민이 살게 됐다.

이처럼 다른 두 집단이 '동거' 를 해왔지만 이 나라에서 지역갈등이 심각하게 드러난 적은 없다. 60년대 말 루뱅대에서의 시위가 가장 큰 분쟁으로 기록될 정도다.

루뱅대 프랑크 델마티노(정치학)교수는 "70년부터 네차례나 개헌을 하며 지역정부의 권한을 확대하는 등 연방정부가 양쪽 지역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며 갈등의 싹을 없애고 있다" 고 말했다.

그는 두 지역이 한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을 "한지붕 아래서 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서로 이웃집에 살며 필요할 때 힘을 합하는 형태" 라고 표현했다.

벨기에-한국 정치사회연구소장직을 맡고있는 이 대학 앙드레 폴 포니에(사회정치학)교수 역시 "두 지역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정치구조나 사회제도를 실정에 맞게 고치는 융통성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 고 융합의 비결을 설명했다.

물론 이 나라에서 지역갈등이 표면화할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최근 플랑드르 지역의 경제력이 왈롱 지역보다 크게 앞서가자 "우리가 낸 세금이 무능력한 왈롱인들에게 돌아간다" 고 주장하는 플랑드르인들이 많아졌다.

이같은 분위기를 타고 '플랑드르 연대(VB)' 라는 독립을 주장하는 정당이 99년 하원선거에서 플랑드르 지역에서 15%를 득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벨기에가 두 나라로 나눠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플랑드르 출신인 패트릭 반크룬켈스펜 연방 상원의원은 "플랑드르 연대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불법체류자 추방 등과 같은 극우주의 정책 때문일 뿐 유권자들이 독립을 원하기 때문은 아니다" 고 주장했다.

"프랑스.영국.독일 등 거대국가의 틈바구니에서 당당하게 힘을 발휘하려면 더 이상 나라가 작아져서는 안된다. 두 지역이 협상을 통해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자벤템 공항에서 만난 대학생 루트 베르그(24)의 말이다.

뮌헨〓유재식 특파원, 스트라스부르.브르타뉴〓이훈범 특파원, 바르셀로나.빌바오〓예영준 기자, 로마.밀라노〓조강수 기자, 에든버러.브뤼셀〓이상언 기자,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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