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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병원 ‘위험비용’ 요구 … 수술비 100만 → 600만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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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달 말 한 미혼모 시설에 20대 미혼 임신부가 찾아왔다. 임신 5개월이었다. 그녀는 인공임신중절(낙태)을 하기 위해 몇몇 산부인과를 돌다가 거부당하자 출산하기로 마음을 먹고 찾아온 것이었다. 이 시설 원장은 “임신 5개월이라 낙태하는 병원을 찾지 못한 데다 그나마 한 곳은 수술비가 600만원이라고 해서 결국 포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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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의 한 산부인과 원장은 지난달 초 30대 여성의 낙태 수술을 했다. 진료 기록은 ‘계류유산(稽留流産)’으로 처리했다. 배 속에서 아이가 사망해 수술한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일종의 편법이었다. 이 원장은 “수술한 산모는 우리 병원에서 여러 차례 출산을 했는데 피임에 실패해 넷째를 가졌다고 해서 그렇게 처리했다”며 “그 집 경제 사정을 빤히 아는데 그냥 낳으라고만 할 수는 없어 남편 동의를 받고 수술한 뒤 피임교육을 해줬다”고 말했다.

‘낙태 파동’이 발생한 지 한 달을 맞았다.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지난달 3일 낙태 병원 세 곳을 고발하면서 생긴 파동이다. 상당수 산부인과 병원이 낙태 수술을 중단하자 비용 상승, 편법 낙태 수술, 준강간을 둘러싼 갈등 등의 새로운 현상이 생기고 있다. 정부가 1일 내놓은 낙태예방종합대책에서 불법 낙태 단속 방침이 빠져 낙태가 다시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프로라이프 의사회에 따르면 그동안 산부인과 병원의 80~90%가 낙태 수술을 중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술을 계속하는 일부 의료기관이 ‘위험비용’을 요구하면서 비용이 크게 올랐다. 미혼모 시설에 입소한 임신 5개월 여성의 경우도 종전에는 100만원 안팎의 비용만 부담하면 됐으나 600만원으로 올랐다. 프로라이프 의사회 최안나 대변인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지만 초기 임신의 경우 수술비가 종전에는 30만~40만원 했으나 최근에는 70만~150만원으로 올랐다”며 “일부 낙태 수술을 계속하는 병원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말 보건복지가족부에 한 기혼여성이 전화를 걸어왔다. “낙태할 수 있는 병원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얼마 전 아는 남자와 성관계를 한 뒤 임신을 하긴 했지만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관계를 했기 때문에 준강간에 의해 임신했다”고 주장했다. 현행 모자보건법은 준강간 임신은 낙태를 허용한다. 하지만 병원들이 준강간 주장을 믿을 수 없다고 수술을 거부하자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준강간이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에서 간음한 경우를 말한다.

강간은 경찰이나 검찰에서 사실 여부가 명확하게 가려지지만 준강간은 경찰서로 안 가는 경우가 많다. 합법적인 낙태 사유의 하나인 근친상간도 마찬가지다. 낙태 파동 전에는 준강간이나 근친상간으로 임신했다고 하면 쉽게 수술이 가능했으나 요즘엔 입증이 불가능하다며 의사들이 수술을 꺼려 갈등을 빚고 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조병구(에비뉴여성의원 원장) 공보이사는 “강간을 당했다거나 임신부에게 병이 있다면서 낙태를 해 달라는 경우가 늘었지만 상당수가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낙태할 데를 찾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원치 않는 임신 상태가 지속되는 경우가 생긴다. 조병구 이사는 “낙태 수술을 하는 병원이 거의 없다 보니 여기저기 문의하다 임신 일수가 늘어나고 있어 걱정”이라며 “상당수 임신부가 초기에 해결하지 못해 3~4개월, 혹은 그 후까지 끌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한 산부인과 원장은 “최근에 여러 병원을 전전하던 17세 고교생이 찾아와 낙태 수술을 해줬다”며 “낙태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은 어차피 여기저기를 헤매다 어딘가에서는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중순까지만 해도 움츠려 있던 산부인과 병원들이 하나 둘씩 낙태를 재개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난해 11월 전재희 복지부 장관이 불법 낙태 단속 방침을 밝힌 이후 실행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로라이프 의사회 심상덕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초 우리가 낙태 병원 세 곳을 고발한 직후 낙태 가능한 병원을 찾는 전화가 많았으나 지금은 많이 줄었다”며 “낙태수술하는 곳이 산부인과의 절반 가량으로 다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신성식 정책사회선임기자, 김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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