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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수를 살려라' … 고종, 인천에 전보 띄워 사형 막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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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서민들의 외식 단골 메뉴인 자장면은 인천이 원조다. 제물포 개항장의 중국인 조계지 청관(淸館)에서 1883년께 생겨났다. ‘인천 드림’을 꿈꾸며 산둥반도에서 건너온 중국인 쿠리(苦力:육체 노동자를 지칭)와 부두 노동자들이 간편식으로 먹던 게 자장면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장면 공화춘(共和春) 원조설’에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1912년 2월 중화민국 건립을 기념하여 ‘공화국 원년의 봄’이라는 의미로 개명한 게 공화춘이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제물포항 하역장의 모습. 증기선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행인과 화물의 모습에서 활기가 느껴진다.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제공]


그 전신인 산동회관은 1905년에야 문을 열었다. 자장면은 그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졌을 거라는 얘기다. 음식점·호텔을 겸한 공화춘은 1984년 문을 닫았는데 인천광역시는 조만간 ‘자장면 박물관’으로 새롭게 단장해 선보일 계획이다. 원조 논란에 관계없이 공화춘은 이미 자장면의 대명사가 됐다.


70년대까지 군부대에선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외설스러운 병영가요가 유행했다. 개화기나 일제 때 마찰 성냥 한 갑이 쌀 한 되 값이나 됐다. 일본인들의 독점 탓이었다. 가난했던 시절 성냥공장에 다녔던 우리의 누이들은 성냥을 적당히 몸에 감춰 내오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러다 들키면 적잖이 수모를 당했을 터. 여하튼 1886년 인천에 일본 성냥공장이 들어선 이후 '성냥공장=인천'이 연상될 만큼 인천에선 성냥을 많이 생산했다.

서울 주재 미국 총영사 샤이에 롱(Chaille Long)은 1887년 9월 3일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요코하마를 거쳐 10월 28일 제물포에 상륙한다. 그때 대불(大佛)호텔과 이태(怡泰)호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3층짜리 서양식 벽돌 건물인 대불호텔은 1888년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가 세운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그 전부터 다른 건물에서 호텔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불호텔로 향했다. 놀랍게도 호텔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손님을 편하게 모시고 있었다’. 한국 최초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4월 5일자로 남긴 비망록이다. 이로 보아 그때 이미 어엿한 호텔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서양식 건물로 따져도 서울 정동 손탁호텔보다 4년이나 더 빠르다.

맥아더 동상이 서 있는 응봉산(鷹峰山) 자유공원은 1888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이다. 개항 이후 각국 조계 안에 있어 당시 각국공원으로 불렸다. 일제 때 서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으나 1957년 맥아더 동상 제막식과 함께 자유공원이 되었다. 맥아더 동상은 인천 상륙작전의 현장 월미도를 내려다보고 있다. 월미도는 해안 매립으로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일본인이 경영한 인천정미소는 1889년에 세워졌다. 하지만 3년 뒤 세워진 타운센드상회의 스팀동력 정미소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정미소다. 미곡 표면에 광택이 나게끔 곱게 도정하고 돌까지 골라낼 수 있어 최상품의 쌀을 생산했다. 이곳에서 도정한 쌀은 일본과 연해주로 나가는 특등 수출품이었다. 상술이 뛰어난 미국인 타운센드는 미곡 무역으로 막대한 재물을 축적했다.

1896년 일제는 한반도 미곡시장을 장악하기 위해 미두취인소(米豆取引所)를 설립한다. 오늘날 주식거래시장과 흡사한 쌀 선물시장이었다. 쌀을 매개로 한 투기와 가격 조작이 만연해 폐해가 컸다. 인천항에 미곡을 싣고 온 한국인 지주와 상인들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그곳을 기웃거리다 쪽박을 차기 십상이었다. 미두취인소는 개항장 일대를 향락의 거리로 바꿔놓았다. 요릿집·술집·여관들로 흥청거렸다(『역사문화총서』,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이광수의 장편소설 『재생』에는 인천의 미두꾼 이야기가 잘 묘사돼 있다. 실연당한 주인공 봉구가 의지하던 친구 김경훈은 미두상 김의관의 아들이다. 와세다 대학에 다니는 유학생 김경훈은 부잣집 건달로 등장한다. 미두꾼 아버지를 죽이고 돈을 훔친 그는 상하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 소설에는 미두의 매수·매도 기간인 210일이 나온다. 오늘날로 치면 선물옵션 기간에 해당하는 셈이다. 청산일을 눈앞에 두면 인천 시가에는 미두꾼들로 북적댔다.

약 2주 동안 대혼란이 벌어지고 벼 100섬, 1000섬을 수확하는 넓은 땅들이 훌훌 날아가 버린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민족 정론지 ‘개벽’은 인천 미두취인소가 ‘피를 빨아먹는 악마 굴이요, 독소’라고 경고한다. 미두꾼 이야기는 채만식의 『탁류』에도 등장한다. 다만 무대가 인천이 아니라 군산인데 1930년대는 쌀을 매개로 한 도박이 전국적으로 확산됐음을 알 수 있다. 『탁류』에서도 주인공 초봉의 아버지 정 주사는 미두에 빠져들어 가산을 탕진한다.

1896년 개항장 재판소가 설치된다. 지방 관아에 속한 재판에 관한 사무 처리가 새로 개설된 재판소로 이관된다. 그해 8월 13일, 김구가 인천재판소로 압송돼 온다. 3월 8일 22세 청년 김구는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일본인 상인을 제거한다. 김구는 그 일본인이 국모를 죽인 미우라의 공범일 거라고 여겨 그를 일격에 쓰러뜨리고 칼을 빼앗아 난도질했다. 판결도 없이 옥중 생활을 하다가 11월 7일자 ‘독립신문’을 통해 자신(본명 김창수)이 교수형 판결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꼼짝없이 죽을 판국이었다.

‘대군주께서 즉시 어전회의를 여셨고 의결한 결과 국제관계와 관련된 일이니 일단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하여 전화로 친칙(親勅)하셨다 한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고종의 전화 한 통이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전화는 텔레폰의 음을 따 덕률풍(德律風)으로 불렸는데 김구가 인천 감옥에 갇혀 있던 1896년 당시에는 개설되지 않았다. 2년 뒤인 1898년에야 개통됐다. 사실을 추적하자면 1894년 12월 1일부터 인천우편국에서 전보를 취급했고 고종은 전보로 김구의 사형 유보를 지시했다. 사형에 대한 중압감으로 경황이 없던 김구가 잘못 들었거나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1899년 9월 18일 오전 9시. 제물포에서 노량진까지 33㎞ 철도구간이 개통된다. 다음 날 ‘독립신문’은 기차 안에서 보는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화륜거 구르는 소리는 우레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마포나루까지 수로로 8시간 걸리던 길을 1시간40분으로 단축한 것이다. 시인 하이네의 말처럼 ‘철도가 공간을 살해’한 셈이다. 개통 당시 증기기관차는 하루 4회 운행했고 내국인 남자가 이용할 수 있는 2등 객실 요금은 80전이었다. 여자는 3등 객실 이용에 40전이었다.

근대 계약이민의 첫 장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떠난 노동자들이 열었다. 1902년 12월 22일 121명이 겐카이마루(玄海丸)호를 타고 인천항을 떠났다.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한 그들은 신체검사를 받고 전염병 보균자 19명이 탈락한다. 나머지 102명이 갤릭호로 갈아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1905년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7400여 명의 이민자가 제물포항을 떠났다.

김종록 객원기자작가 kimkisan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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