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다시 보내는 묵은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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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새 대통령 취임에 즈음하며 1998년 2월 24일 본지에 게재된 글을 다시 드립니다.

*** 前정권의 실패 잊었는가

"취임 초기, 대통령께선 전 정권의 실정을 빌미삼아 보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만간 대통령직이 갖는 책임의 무게는 피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취임 초기 치솟았던 지지도가 퇴임시에 바닥으로 떨어진 전임자의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 입니다. '개혁' 과 '사정' 을 줄기차게 외쳤으면서도 좌초하고 만 전 정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대통령께서 멀리 역사의 과녁을 겨냥하심에 있어 다음의 열가지 고언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지난날 선거공약을 선별해 채택하기 바랍니다. 선거열기 속에서 광범한 계층의 유권자를 의식해 편성한 대다수의 공약들은 재원상의 제약으로 실현 가능성이 작거나 상충된 것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국가 최대 당면과제인 경제위기 극복에 초점을 맞춰 국정과제를 몇가지로 압축?국력을 집결시켜야 합니다.

둘째, 국제통화기금(IMF) 구조조정 요구사항은 대통령에게 걸림돌이자 지렛대로 작용했습니다.

IMF를 벗어난 후에도 부채탕감이나 조세감면ㆍ사회복지확대 등 '대중경제' 식 발상의 정책을 펴기에는 부족한 국가재원의 제약을 의식하기 바랍니다.

셋째, 전임자는 인사가 '만사(萬事)' 라더니 인사 때문에 '망사(亡事)' 가 됐다는 혹평을 받았습니다. 인사에는 두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시대요청에 걸맞은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재를(널리 구해)활용하는 방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과거 정권들처럼 출신지역을 중시하는 방식입니다. 길고 어려웠던 야당생활 중에 신세 진 사람들이 많고 보면 이는 간단명료하게 빚갚음하는 길일 것입니다.

두 방식 중 어떠한 배합을 택할 것인가가 관건이겠는데 취임 후 인사 잡음이 끊이지 않은 것은 후자에 무게를 둔 탓으로 보입니다. 인재를 엄선해 오래 귀하게 쓰십시오.

넷째, 여러가지 정책구상들이 때로 돌출적ㆍ단편적이어서 전체를 수미일관하게 엮는 청사진이 실종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초기의)정부조직개편이 대표적인 사례였습니다.

다섯째, 정부관료조직의 장악력이 요청됩니다. 오늘날 관료의 정부 규제는 민간경제활동을 옭아매고 있습니다.

정치인은 정보와 행정기술을 관료를 통해 배우게 마련이지만, 그 과정에서 관료의 집단이기주의적 로비활동 덫에 걸리기 쉽습니다.

반면 합리성과 절제가 없는 사고와 행동양식을 보이는 것이 정치인입니다.

여섯째, 재벌정책이 중구난방입니다. 빈번하게 발표되는 지침들이 헷갈립니다. 자유시장경제를 지향한다는 원칙을 존중한다면 금융기관의 책임경영체제 확립, 상호지보금지, 결합재무제표 작성 의무화 등(만)으로도 재벌의 문어발 경영은 크게 제약될 수 있습니다.

일곱째, 무리한 노조측의 요구에는 결연한 자세를 보여야 합니다. 성역 없이 '철밥통' 을 부수지 않고는 기업의 국제경쟁력이 강화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덟째, IMF시대의 난국을 1년반이면 극복할 수 있다는 낙관이 문제였음이 근래에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단순히 보유 외환의 유동성 부족문제가 아니었기에 경제 애로의 해소에는 대통령이 5년 내내 총력을 경주해도 부족하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 국가와 역사의식이 중요

아홉째, 이런 관점에서 남북문제도 우선 우리의 경제난국을 넘긴 다음 튼튼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효과적입니다.

마지막으로 굵은 일만 직접 챙기고 잔일은 위임함으로써 심신의 건강유지에 최선을 다해 국정의 중단을 예방해야 합니다. "

3년 전의 글을 반복하는 것이 시건방지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국가와 역사의식이 실종된 듯한 작금의 여야정쟁을 지켜보고 용기를 냈습니다.

97년 대선을 치르던 해에 환란을 겪었습니다. 모르고 당하던 일을 알고도 다시 당한다면 역사의 심판이 어떠하겠습니까.

金秉柱(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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