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피치] 외인 선수에 색안경 낀 일본 언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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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감독이 유니폼 뒷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마운드로 걸어 올라간다.

투수는 감독이 왜 나오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다 이내 자신을 교체하기 위한 것인 줄 알아차린다.

6회초 동점. 그것도 1 - 1 상황에서 선발 투수가 교체된다면 선뜻 볼을 건네주고 들어갈 투수는 거의 없다.

화가 머리 끝까지 솟은 투수는 더그아웃에 들어가자마자 글러브를 내던지며 한바탕 분풀이한 다음 라커룸으로 사라진다.

이튿날 언론들은 투수의 행동을 '불경죄' 로 대서특필한다. 선수의 이름 앞에는 '미친(crazy)' 이라는 별명이 따라붙고 구단 사무실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곧바로 돌려보내라" 는 팬들의 전화가 빗발친다. 선수를 대변해주거나 옹호하는 분위기는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외국인 투수 클라이드 라이트가 1976년 겪었던 일이다. 메이저리그 출신인 라이트는 나가시마 감독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일본 언론에 의해 '이지메' 를 당했다.

상대가 일본인들이 영웅처럼 떠받드는 나가시마였으니 라이트가 테러를 당하지 않았던 것만도 다행일지 모른다.

98년 8월 1일. 일본 언론은 "조성민이 일본어를 잘 몰라 팔꿈치 부상이 악화됐다" 고 일제히 보도했다.

조성민은 당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곤도 감독에게 당했다. 올스타전에서 자신의 팀 선수였던 사사키(현재 시애틀 매리너스)의 무리한 등판을 꺼린 곤도 감독은 "교체해달라" 는 조성민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때 조성민은 팔꿈치가 아픈 상태였다.

그러나 일본 매스컴은 이를 마치 조성민의 일본어가 서툴러 곤도 감독이 못알아들었던 것처럼 보도했다. 결국 조성민은 부상이 악화돼 팔꿈치 수술을 받아야 했다.

라이트와 조성민뿐만 아니다. 일본 프로야구의 특수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보따리를 싸야 했던 외국인 선수는 셀 수 없이 많다.

요미우리를 종교처럼 믿고 나가시마 감독을 신(神)처럼 여기는 대부분의 일본 팬들은 물론 외국인 선수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언론도 일본 프로야구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환경이다.

정민철(요미우리)이 지난 4일 "나는 나가시마 감독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 지난해에도 등판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고 속내를 털어놓자 이튿날 일본 언론은 '정민철, 나가시마에게 반기(反旗)' 라는 제목으로 일제히 보도했다.

스타 플레이어가 머리만 잘라도 '자른 머리가 타격에 미칠 영향' 까지 보도하는 일본 언론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외국인 선수가 나가시마 감독이 이렇다 저렇다 말한다는 것부터가 그들에게는 말도 안된다.

"일본인은 외국인 선수의 발등에 키스를 하거나 그들의 얼굴을 궁둥이로 깔고 앉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한다."

일본의 비평가 다케무라 겐이치가 외국인 선수를 두고 한 말이다.

이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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