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신 전 태국총리 재산 14억 달러 몰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2면

태국 대법원이 26일 23억 달러에 달하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동결 재산 가운데 14억 달러에 대해 몰수 판결을 내린 가운데 탁신 총리의 사진을 든 여성 지지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방콕 로이터=뉴시스]

태국 대법원이 26일 탁신 친나왓(60) 전 총리 가족의 국내 동결 재산 23억 달러(약 2조6000억원) 중 14억 달러를 국고에 귀속시키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의 판결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탁신 지지세력이 향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계획하고 있어 태국 정정은 또다시 혼미해질 전망이다.

대법원은 “탁신이 총리 재직 기간(2001~2006년) 중 통신회사 ‘친’그룹의 주식을 몰래 소유하고 있으면서 총리 권한을 이용해 회사에 유리한 정부 결정을 내리는 등의 방법으로 부당한 이득을 챙겼다”고 판결했다. 탁신 일가의 자산은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로 그가 총리에서 하야한 직후 동결됐다. 탁신 지지자들은 “탁신을 몰아낸 쿠데타 주동자들은 이 판결을 통해 자신들의 쿠데타를 정당화할 것”이라며 지지세력의 결집을 호소했다. 탁신 계열의 ‘붉은 셔츠 운동’은 3월 14일 대규모 시위를 벌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태국 정부는 26일 방콕으로 통하는 주요 간선도로에 200여 개의 검문소를 설치하고 군 병력 5000명을 배치해 경계를 강화했다. 외신들은 지난해 4월 태국 사회를 양극단으로 갈라놓았던 시위 사태가 재연되는 게 아니냐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권좌에서 물러난 탁신은 재임 시 부정부패에 대한 대법원 선고(2년형)를 앞두고 2008년 해외로 도피했다. 탁신은 태국과 범죄인 인도협정을 맺지 않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체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탁신은 화상전화·비디오 등 첨단 매체를 활용해 본국의 지지자들에게 대중 선동을 하고 있다. 

탁신 정부 시절 고위 관료를 지냈던 인사들은 “이번에 환수된 재산은 탁신이 지지자들의 시위를 배후에서 지원했던 정치적 최대 자산”이라며 “무일푼 상태가 되면 탁신의 정치적 영향력도 쪼그라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26일 사우스차이나 모닝 포스트(SCMP)는 전했다.

◆탁신-국왕·군부 갈등이 뿌리= 태국 정국이 이렇게 탁신 문제로 갈라지는 원인은 탁신과 왕실, 군부로 나눠진 권력 구도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탁신은 대중 영합적인 정책을 바탕으로 한 포퓰리즘 정치인이다. 푸미폰 아둔야뎃(83) 왕은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언행이 곧 태국의 통치 이념이고 명분과 정통성의 뿌리다. 군부는 현실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정치 개입 명분을 위해 국왕의 협조가 절실하다. 이 때문에 군은 국왕의 충실한 파트너를 자청하고 있다.

태국 정정이 지난 4년간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된 불씨는 2006년 9월의 군 쿠데타였다. 군은 총선으로 재임에 성공한 탁신에게 부패라는 잣대를 들이대 실각시켰다. 그러나 이면에는 탁신과 국왕의 갈등이 있었다. 두 번 총리에 당선된 탁신은 집권 6년 동안 ‘왕은 존재하되 군림하지 않는다’는 입헌군주제의 틀 안에 국왕을 가두려 했다. 국왕에 대한 간접 비판도 하고, 국왕의 정치적 입김을 막는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려 했다.

국왕과 군의 불편한 심기는 쿠데타의 빌미가 됐다. 그러나 국왕이 보증한 쿠데타 명분과 탁신에게 옭아맨 부패 혐의에도 탁신 지지세력은 2007년 말 총선에서 승리했다. 국민 다수가 정신적으로는 국왕을 지지하지만 현실 정치에선 서민 보호와 경제 발전을 내세운 탁신의 정당을 택한 것이다. 이후 태국 사회는 탁신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인 ‘반독재민주주의연합전선(UDD)’과 왕실·군의 후원을 받는 국민민주주의연대(PAD)로 분열됐다.

홍콩=정용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