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간단치 않은 '문화재 보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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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수만명 주민의 이해가 엇갈린 지역을 문화사적지로 보존키로 한 것은 이번이 광복 이후 처음 있는 일 아닌가 싶습니다. "

경주 경마장 건설 부지와 서울 풍납토성을 사적지로 보존할 것이냐를 논의하기 위해 8일 열렸던 문화재위원회 합동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한 위원은 이같은 말로 소감을 피력했다.

이날 문화재위원회 합동회의장 바깥에는 경주 경마장 건설을 관철하기 위해 상경한 경주시민 1백여명과 경찰병력 80여명이 대치했다.

시민대표들은 '우리는 투쟁한다' 는 글이 적힌 가슴띠를 둘렀다.

회의 참석차 들어오는 문화재위원들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침묵 속에 도열해 있었지만 회의장 안팎의 분위기는 극도로 팽팽했다.

한 관계자는 "지난달 16일 합동회의에서 풍납토성 지역주민 대표가 현지사정을 설명하면서 '우리를 제발 살려달라' 고 울먹일 땐 정말 마음이 착잡했다" '며 "이번에도 지역주민들의 항의와 읍소 때문에 회의 분위기가 시종 무거웠다" '고 말했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위원은 "문화재 매장지역은 한번 파괴될 경우 영원히 복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존 의견이 대세를 형성한 것은 당연한 일" 이라며 "그러나 지역주민들의 생존권 문제가 걸려 이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를 두고 상당히 고민을 거듭했다" 고 말했다.

우리는 흔히 '개발과 보존' 이라는 대칭 어구로 이 문제가 지니는 심각성을 축약한다.

하지만 실제 당면하게 되는 현실은 이날 회의장과 그 주변 분위기처럼 간단하지 않다.

물론 정부가 무궁무진한 재원(財源)을 마련하고 있다면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다. 재산권 행사 제한으로 주민들이 보는 피해를 보상하면 된다. 하지만 예산은 어차피 제한돼 있다.

지난해 5월 풍납토성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정부는 "보존가치가 있으면 돈이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라는 대통령의 말을 전했다가 부랴부랴 말 뜻을 축소하느라 법석을 떤 일이 있다.

문화재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도 누려야 할 소중한 자산이다. 보존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이제는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엄밀히 선정하고 적정한 보상체계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함께 해야 할 때다.

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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