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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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2. "경남기업 맡아라"

1989년 1월 7일 대검 중수부는 ADB(아시아개발은행) 부총재로 재직하고 있던 내게 대한선주 처리에 대해 서면 답변을 요구하는 신문서를 보냈다.

이에 앞서 대한선주의 전 사주측은 "직권을 남용, 불법으로 대한선주를 탈취하고 그 과정에서 공갈협박과 수뢰를 했다" 며 나를 고소했다.

"당시 부실기업 정리를 추진하며 내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이 바로 적법처리였습니다. 재무부 실무자들이 나의 지시로 적법하게 처리한 결과에 대한 도의적 책임은 물론 나에게 있습니다. 재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나는 지속적으로 금융자율화를 추진했습니다. 금융자율화는 남이 주는 게 아니라, 이렇게 어려운 부실 정리를 은행이 책임지고 처리할 때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은행장들에게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헌신적으로 일해 준 재무부와 금융기관 관련 임직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

그 해 1월 16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서울지검 앞으로 내가 보낸 서면 답변의 일부다.

입각 전 외환은행장.은행감독원장 시절에도 대한선주측을 돈을 싸들고 왔지만 나는 일절 받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은 또 남을 공갈협박할 위인이 못 된다.

83년 7월 경제기획원 차관을 떠나 외환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는 공직사회로 다시 돌아가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외환은행장이 되고 1주일이 지나 영동사건이 터졌다.

강경식(姜慶植) 재무장관(현 동부그룹 금융.보험부문 회장) 주재로 은행장 회의가 열렸다.

강장관이 난데없이 경남기업을 외환은행이 맡아 달라고 했다.

1백50억원 정도 지원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경남의 주거래은행인 상업은행은 영동사건에 휘말려 정신이 없을 때였다.

부실 정리와의 악연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만 해도 경남기업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얼마 후 "외환은행이 뒤집어 썼다" 는 소문이 돌았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사팀을 보내 정밀 조사를 해 보니 부실 규모가 엄청났다.

드러난 환부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막상 메스를 대고 보니 엄청난 양의 고름이 쏟아져나온 격이었다.

나는 우선 기업주에게 여권을 내놓으라고 해 보관토록 하는 한편 법무부에 요청해 출국을 금지시켰다.

이와 함께 철저한 자구노력을 요구했다.

주식.부동산.차량 등 눈에 보이는 것은 다 내놓으라고 했다.

기업의 채무상환에 충당토록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부실 기업들의 부실 규모는 보통 해당 기업이 처음 밝힌 액수의 10배에 달했다.

그 해 가을 나는 새로 부임한 김만제(金滿堤) 재무장관(현 한나라당 의원)과 함께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회장을 점심에 초대했다.

경남기업을 맡아 달라고 하자 그가 "현대는 절대 남의 망한 기업을 맡지 않는다" 며 거절했다.

부실기업 인수로 급성장한 대우를 겨냥한 발언이었다.

대신 위탁경영은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몇천 억이나 되는 손실만 메꿔 줄 수는 없었다.

마침 대우쪽에서 옥포조선 문제만 해결해 주면 맡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대신 은행융자로 발생한 손실을 메꿀 시드 머니를 달라고 했다.

이 때 나온 것이 이른바 10-10-10, 이자율 10%로 10년 거치 10년 상환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해서 경남기업은 대우로 넘어갔다.

강경식 장관이 1백50억 정도 될 것이라던 경남의 손실 규모는 대우측의 실사 결과 남은 공사를 마치는 것을 전제로 할 때 5천1백37억원으로 평가됐다.

외환은행과의 최종 조정을 거친 손실액은 3천8백17억원으로 확정됐다.

대우는 경남의 사우디아라비아 진출권을 발판으로 중동에 진출했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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