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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호의 영화풍경] 청춘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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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역설적이게도 사람은 늙어가며 더욱 낭만주의자가 되는 모양이다. 반면에 청춘은 오히려 이성적이다. '비포 선셋'(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9년 전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속편이다. 전편은 오스트리아 빈을 배경으로 우연히 만난 20대의 두 여행자가 단 하루 동안 나눴던 사랑을 다룬 청춘 멜로였다. 그들은 평생의 연인을 찾은 듯 사랑했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랑을 확신하지 않는 '영리한' 젊은이들이었고, 또 그 '완전한' 사랑이 변할까봐 더 이상 지속하지 못하는 '겁 많은' 청춘이기도 했다.

이들 두 남녀가 이젠 30대가 되어 9년 만에 파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다. 빈에서 6개월 뒤 다시 만나자는 약속만 하고 아무런 연락처도 교환하지 않은 채 헤어졌는데, 이제 두 사람은 중년이 되어 기적적으로 재회한 것이다.

그런데 일상의 숙제를 잘 알 것 같은 이들 성숙한 남녀는 과거의 '현명함'이 이젠 후회가 되는지 낭만과 이성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남자는 가장이자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사랑과 일상, 혹은 감정과 이성 사이에 놓여 있는 두 사람은 자신들이 성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감정을 좇아간다.

전편과 속편은 이성/감정, 현실/낭만, 청춘/30대 등으로 대조된다. 두 멜로에 따르면 청춘은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반면, 30대는 감정적이고 낭만적이다. 세월과 낭만 사이의 관계를 역설적으로 잘 이용한 '비포 선셋'은 속편이 전편보다 나은 경우에 포함될 것 같다.

왕자웨이 감독의 '2046'은 '화양연화'(2000)의 속편 격이다. '화양연화'가 1960년대 초의 홍콩을 배경으로 차우(량차오웨이)라는 남자의 로맨스를 다뤘다면, '2046'은 60년대 후반 그 남자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세월이 흘렀건만 영화도 감독도 더욱 낭만적으로 변했다.

'화양연화'의 남녀는 불륜의 끝에서 각자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남자는 아직도 옛 사랑의 포로로 남았다. 다시 말해 '2046'에서 남자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라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다. 그에게 사랑이 존재했다면 아마 '화양연화'에서 모두 소진한 것 같다. 감독의 연출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흘렀다. 10년 전 발표한 '중경삼림'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뚜렷하다. '2046'에선 감정 과잉의 화면들이 부자연스럽게 떠돈다.

두 속편을 보면 사람도 영화도 나이가 들면 더욱 냉철해지는 게 아니라, 반대로 더욱 낭만적으로 변하는 모양이다. 낭만과 이성, 당신은 어느 쪽으로 갈 것 같은가?

한창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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