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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故 조기준 고려대 명예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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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경제학 연구와 교육에 한평생을 바친 조기준(趙璣濬.학술원 회원)고려대 명예교수가 지난 3일 오전 3시30분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84세.

"주무시면서 조용히 돌아가셨다" 는 한 유족의 말은 고인이 해방 후 불모지에서 홀로 한국 경제학의 기틀을 세웠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함경남도 이원에서 태어난 고인은 함흥농업학교를 나와 일본 쇼치(上智)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1942년 만주 창춘(長春)대동학원 연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해방 후 연희전문대.서울대를 거쳐 고려대 교수를 역임했다.

고인의 업적은 근.현대를 넘나들며 경제사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70년대 초.중반 그가 한국경제학회장으로서 주도한 '한국 자본주의 맹아(萌芽)론 논쟁' 은 학문적 '사건' 으로 기록돼 있다. 무릇 학문은 논쟁을 통해 성숙한다는 게 고인의 지론이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우리 자본주의 '싹 찾기' 였다.

당시 고인은 1876년 개항 이후 반제(反帝).반봉건(反封建)투쟁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싹텄다는 논리를 폈다.

갑오농민전쟁은 그가 지목한 대표적 사건. 이에 비해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해방기점론, 연대 김용준 교수는 조선 영.정조 시기론을 각각 내세웠다.

고려대 경제학과 김균 교수가 전하는 고인의 학문 스타일은 이렇다.

"항상 조용하고 사려가 깊으셨다. 특히 연구실에 조교를 두길 거부했다. 공부는 홀로 조용히 해야 하는데 누가 있으면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만년까지 이어진 학문적 열정은 귀감이기에 충분했다. "

고인의 자본주의 연구는 우리 기업 및 기업가 연구로 이어졌다.

73년에 나온 '한국기업가사' 가 그 대표적 산물. 고인은 특히 민족주의로 무장한 초기 기업인들을 주목했다.

80년대 말 그는 한국 자본주의 성격논쟁에도 가세했다.

여기서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멀리하면서 중립적 입장을 견지했다.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장관은 고인에 대한 회고를 "분단의 비극이 개인적 비극으로 이어져 있었다" 는 말로 대신했다.

이는 고인이 98년에 펴낸 '회고록-나의 인생, 학문의 역정' 에 나오는 한 부분을 주목한 것이다.

"북에 두고 온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글을 보태고자 했으나 그것은 필경 참회의 글이 될 뿐이기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 金전장관은 "침묵 속에서 더 깊은 인간적 통한을 들을 수 있었다" 고 말했다.

이런 연유로 고인은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최근 진행되고 있는 남북한 화해 무드를 유난히 반겼다.

그가 99년 학술원에서 북한 경제사 관련 논문을 발표한 것도 같은 맥락. 하지만 고인은 급진전하는 시장개방과 자본자유화에 대해선 불안감과 함께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다.

유족은 부인 송정애씨와 아들 조명기(삼성금융연구소 수석연구원)씨 등 1남3녀. 빈소는 고대안암병원이며 발인은 5일 오전 9시. 928-0570.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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