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가짜를 딛고 진짜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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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가 세계 1위인 것이 있단다. 가짜 유명 상품을 만드는 재주다. 가짜는 이태원 골목에서만 팔리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는 수출되기까지 한단다.

홍콩에서 팔리는 많은 가짜 유명 브랜드 제품이 한국에서 만든 것이란다. 기자의 질문에 상인은 가짜와 진짜를 거의 구별할 수 없다고 답한다.

가령 가방을 만들 경우 그 원단 자체를 진짜 제품과 같은 것으로 쓰고, 제작 기술이 조금도 뒤지지 않기 때문이란다.

관계 당국에서 가짜 제품을 단속할 때마다 나는 내심으로 그 제조업자들에게 큰 피해가 없기를 바라곤 한다. 가짜가 공헌하는 바도 있기 때문이다.

우선 상표 때문에 많은 외화를 낭비하는 이들의 자부심을 무참하게 뭉개버릴 수 있다.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도 값비싼 수입품이 많다고 하는데, 진짜와 같은 가짜를 대량으로 세상에 퍼뜨리면 바보가 아니고서야 비싼 수입품을 사려 들지 않을 것이다.

또 가짜는 잘난 이와 못난 이, 상류와 하류라는 차별을 지워버리게 한다. 가짜로 행세하기로 하면 누구나 명문대 출신으로 의사나 법관이 될 수 있다. 너나 없이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이라는 가짜 딱지를 이마에 붙이고 다닐 수가 있다.

현재 분류대로 놔두어도 좋다. 모두가 가짜인 마당에 출세자와 평민을 가르는 것이 무의미하다.

***상류인.평민을 가를 수 있나

유명 상표를 단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먹고 입는 것은 큰 차이가 없다. 상류인이라고 해서 밥을 두 그릇씩 먹고 신을 두 켤레씩 겹쳐 신지 않고, 하류인이라고 해서 반 그릇만 먹고 한 쪽 신만 신고 살지는 않는다.

하류인은 가난해서 원하는 대로 못 먹지만 상류인은 살찔까 두려워 생각나는 대로 먹지 못한다. 농부는 논밭에서 노동을 하지만, 도시인도 어떤 형태로든 운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시들어 버리고 만다. 도둑맞을까 봐서 진짜는 감춰 두고 가짜 다이아몬드를 차고 다니는 상류인이나, 처음부터 편하게 가짜를 차고 다니는 이가 다를 바 없다.

실제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좋은 상표를 잡으려고 하는 우리의 마음이다. 만약에 상표를 구할 필요가 없게 된다면 우리의 욕망과 고통도 없어진다.

***모방 아닌 자기 세계로 가야

유명 상표가 만들어 내는 문제를 지우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아예 상표 자체를 없애는 것과, 누구나 원하는 만큼 가질 수 있게끔 유명 상표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금강경』은 상표 자체를 무의미한 것이라고 지워 버린다. "부처를 보되 부처를 지우고 볼 수 있으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즉시 부처를 볼 수 있다" 고 가르친다. 선에서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치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치라" 고 한다. 반면에 『법화경』은 상표를 마구 찍어낸다. "누구나 부처가 가진 모든 재산의 상속권자" 라고 설한다.

'나' 와 '내가 소유하는 것' 이라는 상표를 지어내고 그것에 탐착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가짜다.

구름이나 물이 자기와 자기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허구이듯이, 나와 내 것도 또한 허구다.

그러나 중생인 우리는 이 허구를 디딤돌로 삼아 출발하지 않을 수 없다. "땅에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 는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꿈 속의 호랑이는 가짜지만 잠자는 이를 깨우고, 포르노 영화는 화면속에 발가벗은 남녀가 들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동하게 한다.

진짜 인생을 꾸미려면 우선 예수나 석가를 모방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저들은 참 생명 설계 프로그램 코드를 감추거나 지적재산권을 주장하지도 않으니, 예수나 석가의 모형을 아무리 만들어도 괜찮다.

단지 모방에서 멈춰서는 안된다. 복사가 아닌 자기만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삶에서의 진짜 유명 상표는 없기로 하면 아무 것도 없고, 있기로 하면 두두물물 일체동작이 그대로 유명 상표가 된다.

"빙빙 돌리지 말고 진짜를 구체적으로 대라" 고 다그치지 말라. 가짜 경계를 벗어난 이만 스스로 진짜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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