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서예 전통 시들어 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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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서예 2천년전' (11일까지)은 근래에 보기 드문 대규모 서예전이다. 전시 제목 그대로 우리나라 서예의 전통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획전이다.

사람들은 좀처럼 믿지 않으려 하겠지만 이런 이름으로 서예전이 열린 것 자체가 우리 시대에 처음 있는 일이다.

우리는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 전통을 갖고 있다고 말로는 늘 외쳐대지만 그것을 가슴 속에 느끼며 살고 있는 민족이 아니다. 교과서에 그렇게 쓰여 있고, 또 그렇게 말해야 위안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할 뿐이다.

우리나라 4대 명필(名筆)로 손꼽히는 신라의 김생(金生), 고려의 탄연(坦然), 조선의 안평대군(安平大君)과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실작품을 본 적이 있는 분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 간다.

*** 눈길 끈 '한국서예 2천년展'

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한국미술사를 가르칠 때 지광국사현묘탑비(智光國師玄妙塔碑)를 슬라이드로 비춰 보이면 학생들이 "우아" 하고 감탄을 보낸다.

나는 처음에는 높이 5m가 넘는 장대한 규모의 화려한 비석에 새긴 정교한 글씨에 찬사를 보내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이 유물은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고려시대 대표적 문화재로 지목하여 곧잘 시험 문제로 나오는데 그 이름이 길고 무슨 암호 같아서 외우는 데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속썩이던 지광국사현묘탑비가 저렇게 생겼다는 것을 보는 순간에 일어나는 회한의 외마디 소리였던 것이다.

신라 김생의 글씨는 현재 전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지천년(紙千年) 견오백(絹五百)이라 해서 종이는 아무리 길어야 천년 이상 갈 수 없다고 했으니 1천3백년 전 글씨가 남아있을 리 없다.

***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장르

그러나 김생 사후 2백년쯤 뒤인 954년에 단목(端目)이라는 스님이 김생의 글씨를 정성들여 집자(集字)하여 낭공(郎空)대사비를 세운 것이 있어 우리는 김생의 글씨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문인.묵객들은 이 비문을 탁본하여 책으로 꾸며놓고 김생 글씨를 보고 배우며 익혔던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한국서예 2천년전' 에는 그런 내력을 갖고 있는 김생 글씨의 낭공대사비 앞 뒷면 탁본이 전시돼 있다.

서예는 현대인과 점점 멀어져 갈 수밖에 없는 장르다. 옛날 분들은 오늘날 우리가 볼펜 쓰듯이 붓을 사용했지만 오늘의 우리는 볼펜조차 멀리하고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으니 글씨의 매력을 체감하지 못한다.

더욱이 한자에 거의 문맹인 신세대들은 옛 서예 작품이란 그 글씨가 그 글씨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금만 익숙해지면 글씨는 어느 예술 못지 않은 매력적인 장르임을 깨닫게 된다. 서양 고전음악도 처음 듣는 사람은 꿍꽝소리로만 들린다.

푸치니의 가극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 라는 아름다운 노래는 그 가사를 알아들어 감상하는 것이 아니다.

유명한 안평대군 글씨에는 참으로 고결한 귀(貴)티가 서려 있고, 금강산 사람 양봉래(楊蓬萊)의 초서는 조금도 막힘이 없으며, 떡장수 아들 한석봉 글씨는 그렇게 또박또박 정밀할 수가 없다.

정조 때 한 시인은 명필 이광사(李匡師)의 글씨는 눈보라 속에 사냥꾼이 말을 타고 치달리는 듯하고, 윤백하(尹白下)의 글씨는 가을달이 비치는 창가에서 근심 서린 아낙네가 비단을 짜는 듯하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글씨를 보면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는 서예박물관이 없고, 박물관에 가도 서예실이 따로 꾸며져 있지도 않다.

그래서 '한국서예 2천년전' 같은 전시는 더욱 귀하고 고마운 특별전인 것이다. 전시장을 돌아보고 나서 관계자에게 노고를 치하하고 관람객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그래도 생각밖으로 하루 2백명이나 다녀간다고 '그 기쁨과 보람을 '말한다.

하루 2백명이라! 그 숫자는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파리 오르세미술관 특별전 관람객의 몇십분의 일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있기에 우리 서예의 전통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가녀린 자부심이 슬프게 다가온다.

兪弘濬(영남대교수.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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