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나노' 과학이 성공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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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올해 과학기술자 신년하례식에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앞으로 정보통신기술.생명과학과 함께 나노과학기술 분야를 국가적으로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나노 과학기술(nanotechnology)이란 나노미터(10억분의 1m) 정도로 아주 작은 크기의 소자를 만들고 제어하는 기술로서, 근본적으로 분자 및 원자 단위의 작동원리를 이용해 인간 생활에 필요한 여러 기계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나노기술이 발달하면 예를 들어 손톱에 붙이고 다닐 수 있는 컴퓨터나 사람 혈관 속을 돌아다니면서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의료용 로봇과 같이, 과거에는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볼 수 있었던 초소형 기구들이 실용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기에 시장규모나 산업적 부가가치도 매우 클 것으로 예측돼, 미국에서는 매년 수억달러의 연구비를 투자하는 국가 특별과제로 선정하는 등 선진국에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나노과학기술은 현재의 소형화 기술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기술이 아니다. 물론 지금도 반도체를 비롯한 여러 전자제품은 꾸준히 소형화하고 있지만, 물리적 법칙의 한계 때문에 지금의 개념과 동작원리를 그대로 이용해 나노미터 정도의 크기에서 작동하는 소자를 만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소자와는 근본적으로 개념을 달리하는 원자와 분자 수준의 동작 원리를 규명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미 몇몇 분야에서는 실용화가 가능한 아이디어도 나와 있는 등 나노과학기술의 앞날은 상당히 밝은 편이다.

하지만 아직도 탐색단계에 있는 분야가 대부분이어서 나노과학기술의 성패는 공학적 제조기술의 발전보다 분자와 원자수준의 새로운 원리를 탐구하는 기초과학에서 획기적이고 실용적인 연구성과를 얼마나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러한 환경변화는 우리나라의 연구개발 전략에도 커다란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첨단 기초기술을 창출하는 데에는 창의력있는 유능한 인재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물론 과거 우리나라가 주력했던 모방기술 습득이나 단순 공정개발에서도 유능한 인재는 필요했지만, 부족한 부분은 돈으로 사오거나 많은 인력을 투입함으로써 보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첨단기술은 돈으로 사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독창적인 기초연구 성과가 수많은 범재(凡才)들이 모여서 연구한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나라 나노과학의 성패도 유능하고 독창성인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들을 얼마나 관련 분야로 유인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미국에서도 나노과학의 강력한 주창자인 캘리포니아주립 샌디에이고대의 총장 다인스 박사는 미국 나노과학의 성공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화학과 물리학 등 기초과학 분야의 인재양성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도 최근 교육부를 부총리급 교육인적자원부로 승격시키는 등 인재양성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사회의 많은 분야에서 이러한 변화를 읽지 못하고 과거의 패러다임에 얽매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예를 들어 이번 서울대의 학부 정원 조정에서는 기초과학분야를 담당하는 자연과학대학의 정원이 가장 큰 비율로 축소됐고, 앞으로 의.치대로 진학할 졸업생까지 고려하면 기초과학을 전공할 학생 수는 거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판단된다.

이번 조치에 기초학문을 중점 육성해야 할 국립대학의 역할을 고려한 흔적은 보이지 않고, 이 영향이 다른 대학교에도 파급되면 그렇지 않아도 열악한 한국의 기초과학 연구환경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무리 정부에서 나노과학기술 육성을 외치고 연구비를 집중 투자한다 해도 우리가 세계에서 경쟁력을 가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앞으로 정부의 과학기술 연구개발 정책은 연구비 확충에 못지 않게 유능한 인재 양성에 중점을 둬야 할 것이고, 민간분야에서도 이러한 추세에 발맞춰 제대로 된 개혁을 해야 21세기에 경쟁력 있는 국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 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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