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를 다지자] 24. 무역전선 고질 '적당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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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통틀어 12년간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일본 무역관에서 근무한 뒤 지난해 귀국했다. 일본 기업들은 이쪽에서 정확성을 지키고 신뢰감만 주면 참 편한 거래 상대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우리 무역관이 국내 기업에 1백건의 무역을 알선하면 그 중 90~95건이 실패했다. 원인은 '한국식 적당주의' 때문이었다.

몇해 전 일본은 태풍 피해로 마늘이 많이 모자랐다. 반면 국내엔 마늘 풍년이 들어 우리 무역관은 수출을 알선했다.

일본 바이어들은 그들이 원하는 마늘의 크기.무게.포장방법을 상세히 적어 주며 "A급 샘플과 가격을 제시해 달라" 고 했다.

그러나 한국측은 "품질별로 사들인 것이 아니어서 A급을 고를 수 없다" 며 거절했다. 일본 바이어는 A급 선별에 드는 비용까지 대겠다고 했다. 수출 가격에 합의까지 했으나 막판에 거래가 무산됐다.

한국측이 마늘 샘플을 박스에 담아 보냈는데 거기엔 A급과 B급이 뒤섞여 있고 일부 마늘엔 싹이 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듬해 일본에선 배추가 흉작이었다. 일본측 부탁으로 우리는 아홉명의 바이어를 국내에 소개했다. 그들은 국산 배추의 품질에 만족했고, 일부는 계약금을 주고 11월 선적분을 예약한 뒤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국내 배추 산지의 지역 신문에 일본 바이어들이 몰려온다는 기사가 나자 선금을 받았던 농부들이 계약을 깨뜨리고 앞다퉈 값을 올렸다. 결국 계약은 물건너갔고 한 포기도 수출하지 못했다.

1999년엔 국내의 한 지방 수출대행회사에 일본 농산물 바이어 세명을 소개했다. 그 회사 직원은 며칠 후 잘 정리된 자료를 들고 일본으로 와 보통 6개월 걸리는 계약을 두달 만에 체결했고 석달 만에 수출고가 2백만달러를 돌파했다.

그런데 반년쯤 지나 바이어들이 박스 속 방울토마토의 크기가 들쭉날쭉하다고 불평하기 시작했다.

박스 위에는 큰 것, 아래엔 작은 것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일본 수입상들은 통관 뒤 박스를 뜯어 다시 분류해 포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클레임을 걸어도 고쳐지지 않는다는 그들의 지적에 부끄러울 뿐이었다.

박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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