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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보다 센 국회·법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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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주로 패하는 쪽은 국방부다. 3번에 2번 꼴로 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선 지자체와 주민의 대응이 조직적이다. 수원시 의회는 ‘비행장 특별위원회’까지 만들었다. 수원비행장 소음 피해 소송엔 4년간 주민 20여만 명이 서명했다. 지난해 480억원을 물어주라는 판결을 얻어낸 것도 다 이런 노력 덕분이다. 법원도 봐주는 게 없다. 국방부 관계자는 “법원이 군보다 민의 손을 더 들어 주고 있다”며 “젊은 판사들일수록 주민 재산권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견디다 못한 국방부는 며칠 전 대책을 내놓았다. 4월쯤 전국 군 비행장 주변의 고도제한을 느슨하게 풀어 주기로 했다. 소음이 심한 곳엔 방음벽도 만들어 줄 계획이다. 국방부 대변인은 “군과 민의 윈윈대책”이라고 했지만 말끝엔 씁쓸함이 담겼다. 어느새 국가 보위보다 더 세진 주민의 재산권에 군이 사실상 손을 든 셈이니.

그렇게 세진 재산권이지만 아직 못 건드리는 곳이 딱 두 곳 있다. 여의도 국회와 서초동 법원 일대다. 두 곳의 하늘은 30여 년간 입법권과 사법권이 독점하고 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엔 지금도 5층 넘는 건물을 지을 수 없다. 1975년 여의도에 입성한 국회가 이듬해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사당의 존엄성’을 이유로 들었지만 속내는 국회보다 폼 나 보이는 건물을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결과는 기형이 된 여의도다. 여의도 공원을 중심으로 동쪽은 마천루 숲, 국회가 있는 서쪽은 납작한 동고서저(東高西低)가 됐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한쪽 팔은 우람한데 다른 한쪽 팔은 꽁꽁 묶여 마른 나뭇가지처럼 시든 꼴이다. 금융 당국이 여의도를 아시아의 금융허브로 키우고 싶어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이유다.

서초동 법원도 비슷하다. 주변에 7층 넘는 건물은 지을 수 없다. 그 바람에 대법원 청사 앞쪽 ‘꽃마을’ 부지는 단골 민원 대상이 됐다. 오래전부터 대림산업·금호건설 등이 고층 아파트를 짓겠다고 나섰지만 지금도 빈 땅으로 남아 있다. 대법원 측이 “세계 어느 나라에도 대법원 건물 앞에 높은 빌딩이 들어선 곳이 없다”며 반대한 탓이다. 그러다 보니 땅값도 큰 차이다. 대법원에서 벗어난 서초역 일대는 평당 1억원이 넘지만 꽃마을 쪽은 그 절반 값에도 잘 안 팔린다고 한다.

그렇다고 소송을 내는 주민은 거의 없다. 안 되는 줄 뻔히 알기 때문이다. 인근에서 20년 넘게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다는 K사장은 “변호사부터 말린다. 대법원과 법으로 겨뤄 이길 수 있겠느냐며. 그래서인지 소송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군 비행장까지 주민 재산권에 한 수 양보하는 판에 국회·법원이 고도제한을 고집하는 건 난센스다. 어차피 두 건물은 외딴 섬처럼 도로로 둘러싸여 있어 안전·보안상의 문제도 없다. 이쯤 해서 전근대적 ‘권력형 규제’는 거둬들이는 게 옳다. 4월 국방부 발표에 맞추면 시기도 적절하다.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더 미루다간 그나마 남은 권위마저 잃을 수 있다.

물론 이럴 때 국회와 법원이 반대논리로 내놓는 단골메뉴도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보라는 거다. 워싱턴은 전역이 고도제한을 받는다. 1791년 수도로 정해진 지 200년이 넘도록 12층 넘는 건물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워싱턴과 서울은 다르다. 워싱턴은 애초에 행정도시로 지어졌다. 뉴욕이나 서울처럼 복합 비즈니스도시가 아니다. 정히 워싱턴의 국회 의사당과 연방 대법원이 부럽고 흉내 내고 싶다면, 방법은 있다. 세종시로 가는 것이다. 마침 세종시도 행정도시다. 거기에 의사당과 대법원이 터를 잡으면 주변엔 3층 이하만 지으라고 한들 누가 반대하겠는가.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