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방독면' 불량 알고보니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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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정부가 전쟁이나 화재에 대비해 2200여만개의 방독면을 보급하는 '국민방독면 보급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방독면의 성능이 크게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방독면 공급업체가 방독면 성능 시험기를 조작해 합격 판정을 받은 데다 납품업체 선정과정에서 관련 공무원들과 국회의원 보좌관에게 금품 로비를 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20일 검찰과 업계 등에 따르면 행정자치부(소방방재청)가 추진한 방독면 보급사업은 2007년까지 화생방.화재 겸용인 다용도 방독면 또는 화생방 전용인 일반형 방독면 가운데 한 가지를 지방자치단체가 구입해 주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는 것이다. 방독면 구입비의 30%는 국비에서 지원된다.

그러나 2000년 납품업체로 선정된 삼공물산이 만든 시제품은 한국화학시험연구원이 주관하는 성능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다 2001년 5월 3차 시험에서야 가까스로 합격했다.

하지만 실제 납품하기 위해 만든 방독면 역시 6월 성능시험에서 "정화통의 일산화탄소 제거성능이 착용 3분 뒤 350ppm 이하가 돼야 한다"는 기준에 미달, 또다시 불합격했다. 시험 결과 23초 만에 350ppm의 일산화탄소가 통과했기 때문이다.

이에 회사의 성능시험 책임자였던 차장 심모(43)씨가 성능시험 기기 조작에 나섰다. 성능시험이 회사에 설치된 시험기로 이뤄진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심씨는 그 해 9월 방독면 성능시험기에 부착된 호스에 3개의 구멍을 뚫어 공기가 유입되게 해놓았다.

일산화탄소의 농도를 낮춤으로써 시험을 통과했다. 이렇게 해서 불량 방독면을 만든 뒤 회사 측은 서울 서대문구에 5600여개를 납품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 2월까지 서울시내 25개 구청에 13만4000여개의 다용도 방독면을 납품했다. 대금으로 26억9000여만원을 받았다. 구청들은 방독면을 구입해 민방위대원 등에게 지급했다.

또 이 회사 대표 이모씨는 조달청 공무원 4명과 행자부 공무원 1명 등 5명에게 현금 850만원에서부터 30만원짜리 상품권 등을 줬다.

조달청 담당 공무원 왕모씨에게는 2000년 말 "국민방독면 납품업체로 선정되게 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50만원을 준 뒤 납품업체로 선정되자 추가로 800만원을 건넸다.

삼공물산 측은 지난해 10월에는 국정감사에서 한 국회의원이 국민 방독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자 이를 막아 달라며 민주당 김모 의원 보좌관 박모씨에게 2000만원을 주기도 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20일 방독면 성능시험을 조작해 서울시내 각 구청에 불량 방독면을 납품한 혐의(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등으로 삼공물산 대표 이씨와 조달청 공무원 왕씨 등 4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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