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지명의 無로 바라보기] 치우침 없는 조명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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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텔레비전에서 장가 못 드는 농촌 총각을 다룬 특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 2천 1년도 대명천지에 40세가 넘도록 장가를 못 드는 농촌 남자들이 수두룩하단다.

서산의 한 결혼 상담소에 접수되어서 수년째 대기중인 노총각의 수만도 200명이 넘고, 그들이 여자를 맞이할 기약도 없단다.

농촌 남자들이 중국 동포들을 아내로 맞아들여서 낭패를 본 이야기, 필리핀 여인들이 농촌으로 시집와서 실망하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들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식욕과 색욕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강한 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쥐 등을 이용해서 실험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색욕이나 생식욕은 식욕 못지 않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구이다. 먹지 못하면 죽고, 색은 없어도 살아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삶의 고통은 죽음의 것보다 덜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배고픈 이를 구제하기 위해 먼 곳에 식량을 보내면서, 바로 곁에서 색에 굶주리는 노총각들은 방치한다.

*** 소외받는 농어촌 총각들

한 여성 전문가는 "농촌의 생활 조건이 개선되어야만 여성들이 농촌에서 살려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럴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활 조건을 바꾼 다음에 농촌 총각들이 장가 들 수 있게 하려면, 그들은 영원히 독신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생활 조건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농촌에서 하나가 좋아진다면 도시에서는 둘이 좋아질 것이기 때문에, 생활 조건의 면에서 농촌은 도시를 따라 잡을 수가 없다. 해결책은 우리의 조명 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스타를 잠깐 보려고 쫓아가다가 압사 당한 여중생이 있었다. 스타가 사는 아파트 주변에는 밤마다 "오빠 부대"들이 몰려들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이 잠을 설친다. 스타들에게 무슨 대단한 매력의 알맹이가 있는가. 별것 없다.

그들은 단지 조명을 받는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조명의 방향을 조금만 바꾸면 여자들의 관심을 그쪽으로 모을 수가 있다.

텔레비전에서 농촌의 총각을 부드럽고 따뜻하고 강하고 멋있고 신념에 찬 사람으로 부각시켜 보라. 지금 당장 전국의 모든 독신녀들이 농촌으로 몰리지는 않겠지만, 농촌을 덜 기피하려 할 것이다.

*** 도시 편중정책 개선해야

정부의 인사가 있을 때마다, 집권당과 지역 기반을 달리하고 있는 이들은, 한 지역 출신들에게 요직이 치우쳤다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농촌 총각들이 저와 같이 고통을 겪고 있는 데도, 우리의 조명이 치우쳤다고 화를 내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회 정의와 이웃 보살피기의 감각이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음이 분명하다.

지난 대학 수능시험에서 만점자가 6십명이 넘게 나온 일이, 우리의 편중을 다시 한 번 증명해 준다. 농어촌에서 부모님 일을 돕던 학생이 아니라면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를 몇 개만 만들었어도 만점자는 나올 수가 없었다.

새끼 꼬는 법, 밧줄 매는 법 등을 수학 과학으로 응용해서, 농어촌 출신만 답을 만들 수 있게 했더라면, 어떻게 만점이 나올 수 있는가.

서울대는 내년 입시에 농어촌 출신 100명을 정원 외에 특별 입학시키겠다고 한다. 그러나 "출신"만으로는 안 된다. 농촌에서 부모 일을 돕고, 농촌을 사랑하고, 농촌으로 돌아가고 싶은 학생을 선발해야 한다.

부모는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는데, 방에 앉아 출세해서 도시로 진출할 것만을 꿈꾸는 "우등생 귀한 자식"을 특별 입학시켜서 농촌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텔레비전 광고가 보여 주었던 대로, 책가방을 놓고 환경미화원 아버지의 쓰레기 가득한 수레를 밀어 주는 그런 학생을 골라내서 특별 입학을 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에게는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불가사의한 정열이나 충동이 있다. 그것 때문에 고생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장애인, 고아, 노인, 환경, 사회 정의 등을 살피는 일에 일생을 바치는 이들이 있다. 조명의 방향을 틀어 여성들의 마음을 잡으면 촌남자도 도시인처럼 자식을 낳고 살게 할 수가 있다.

석지명(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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