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영화평론가 고 이영일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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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영화 평론에는 무엇보다 사물을 꿰뚫는 통찰력이 있어야지. 잘 쓴 비평은 언제나 재미있고 상쾌하거든. "

지난 18일 70세를 일기로 타계한 영화평론가 이영일(李英一)씨의 영화 평론에 관한 지론이었다.

고인은 광복 후 우리의 영화계가 황무지나 다름없던 시절, 고독하게 비평정신을 지켜온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 평론가다.

그의 삶은 '영화예술' 이란 잡지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5년 창간해 96년까지 1백6호를 발행한 이 잡지는 얄팍하고 심심풀이 평론이 넘실대던 영화 잡지들 속에서 정론 비평을 지향하며 30여년을 버텨왔다. '영화예술' 은 지난해 영인본으로 묶여 출간되기도 했다.

이 잡지를 만들며 보람만큼 그를 따라다녔던 것은 경제적 고통이었다.

그가 매달 찍어낸 1천부는 다 팔리지도 못한 채 창고에 쌓여갔고, 매달 몇백만원씩 적자가 났다.

유현목 감독 등 지인들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결국 대지 1백평짜리 집을 팔고 부인이 일자리를 찾아나서야 했다.

깐깐하고 강직하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그때만은 크게 마음 아파했다는 게 동료 평론가들의 얘기다.

평론가로 불리지만 실제 그는 사료수집가이자 한국 영화사 연구의 원조격이다.

그가 쓴 『한국영화전사』(69년)는 후배 영화학자들이 비켜갈 수 없는 핵심 텍스트로 남아 있다.

20.30년대 잡지와 영화 서적, 그리고 윤봉춘.복혜숙씨 등 초기 영화인들과 인터뷰한 녹음 테이프 같은 각종 사료가 사무실 창고와 집 지하실에 가득하다.

'영화예술' 이 나오던 해 한국영화평론가협회를 창립한 그는 작고 전까지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과 영상원 강사 등을 지내며 세계에 한국영화를 알리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족적에 비해 장례식장은 조촐했다. 자그만한 접객실에 몇몇 동료와 후배 평론가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화려할 필요야 없지만 '한국영화계에 이렇게 사람이 없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다들 돈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 라는 고인의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영화예술' 을 복간하는 것과 마구 쌓아둔 자료를 차곡차곡 정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송곳같이 추운 날씨가 한풀 꺾이던 날 아침, 그는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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