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김수영 '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책을 한권 가지고 있었지요. 까만 표지에 손바닥만한 작은 책이지요. 첫장을 넘기면 눈이 내리곤 했지요.

바람도 잠 든 숲 속, 잠 든 현사시나무들 투명한 물관만 깨어 있었지요. 가장 크고 우람한 현사시나무 밑에 당신은 멈추었지요.

당신이 나무둥치에 등을 기대자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지요. 어디에 닿기만 하면 녹아버리는 눈. 그때쯤 해서 꽃눈이 깨어났지요.

때늦은 봄눈이었구요, 눈은 밤마다 빛나는 구슬이었지요.

- 金秀映(35)『책』

사랑하는 연인이 금방 왔다가 금세 가버린 것 같이, 그대 손등에 얼른 내렸다가 얼른 녹는, 그런 깜빡 꾼 봄꿈 같은 눈을 보셨는지요. 하얗게 산을 그리며 오는 봄눈을.

김용택(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