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탄핵 정국 혼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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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필리핀 상원이 16일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의 부정혐의를 결정적으로 입증할 은행 비밀계좌 조사를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데 이어 17일에는 탄핵재판을 무기연기해 필리핀 정국이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16일 상원의 결정에 반발해 대통령 탄핵 지지파인 아킬리노 피멘텔 상원의장이 사임했으며 하원의 탄핵검사 11명 전원도 사퇴했다. 이어 상원은 17일 하원이 추후 절차를 결정할 때까지 탄핵재판을 중지시켰다.

하원은 탄핵검사를 새로 지명할 수 있지만 탄핵의 최종 결정권을 쥔 상원이 사실상 에스트라다의 손을 들어준 상황에서 선뜻 탄핵검사를 맡겠다는 하원의원을 찾아 재판을 속개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마닐라에서는 상원의 결정에 반대하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도심으로 몰려나와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밤샘 시위를 했다.

대통령 사임을 줄곧 주장해 온 가톨릭 지도자 하이메 신 추기경은 시위대들에게 "우리 모두 에스트라다가 유죄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며 "유혈사태를 막을 수 없을지 모른다" 고 말했다.

홍콩을 방문 중인 피델 라모스 전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 가능성을 경고했다.

1986년 독재자 마르코스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던 '피플 파워' 의 상징인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과 국민의 인기가 높은 글로리아 아로요 부통령도 촛불시위에 참가해 "에스트라다가 필리핀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 고 비난했다.

앞서 상원은 16일 비밀계좌 조사를 허용해 달라는 탄핵검사의 요구를 표결에 부쳐 22명의 의원 중 21명이 참석한 가운데 11대 10으로 부결했다.

조커 아로요 탄핵검사는 "이번 표결로 결정적인 조사가 무산된 것은 물론 상원의 의중이 밝혀졌다" 며 "탄핵재판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라고 허탈해 했다.

탄핵안은 배심원 역할을 하는 상원의원의 3분의2 이상(최소 15명)이 찬성해야 가결되는데 이번 표결 결과 탄핵을 확실히 지지하는 사람은 10명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 통과가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한숨을 돌린 에스트라다 대통령은 이날 "때로는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질 수도 있는 것" 이라며 "필리핀의 단결과 평화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폭력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도하자" 는 성명을 냈다.

마이크 톨레도 대통령 공보비서관은 "탄핵검사들이 이번 상원 표결을 탄핵재판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핑계로 이용하지 않기를 바란다" 며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 말했다. 상원의 무죄 평결을 받아내 국면을 정면돌파하겠다는 뜻이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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