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대통령 등장한 FOX의 '24' … 오바마 당선 디딤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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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호 20면

‘24’에서 팔머 대통령을 맡은 데니스 헤이스버트.

2008년 제60회 에미상 시상식에선 새로운 기록이 만들어졌다. HBO에서 방영된 7부작 ‘존 애덤스’가 미니시리즈 부문 작품상 등 13개 부문에서 수상해 역대 최다 수상 기록을 깨뜨린 것이다. 이 작품은 미국의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일대기를 통해 건국 초기 50년사를 펼친 정치 서사극이었다. 미국 초등학교 교재로 사용될 만큼 호응을 얻었다. ‘웨스트 윙’ 이후 ‘존 애덤스’도 성공을 거뒀지만 미국에서도 정통 정치 드라마가 흔치는 않다. 정색하고 정치를 다루기보다 재미를 더하는 이야깃거리로 정치를 다루는 미국 드라마가 많다.

정치 드라마와 미국 정치의 함수관계

2001년 말 시작해 현재 시즌 8이 방영 중인 FOX의 ‘24’는 메가히트를 기록한 미드다. 대테러기관 CTU의 특수요원인 잭 바우어가 24시간 동안 테러진압 작전을 수행하는 내용이다. 24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을 24개의 에피소드로, 1편에 한 시간씩 담은 리얼타임 형식은 헤어날 수 없는 중독성으로 수많은 ‘미드 폐인’을 양산했다. 속도감 넘치는 대테러 작전이 드라마의 한 축이라면 또 다른 축은 늘 테러의 대상이 되는 정치인이다.

시즌 1의 인물 데이비드 팔머는 상원의원이자 유력한 대통령 후보다. 흑인인 팔머는 도덕적이고 진취적인 정치인으로 그려진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돼 시즌2, 시즌3까지 등장한다. 시즌3은 2004년 여름까지 방영됐는데, 그해 여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버락 오바마라는 흑인 상원의원이 단숨에 정치 스타로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가상의 인물 팔머와 현실의 인물 오바마는 겹쳐졌다. 2008년 말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됐다. “드라마가 오바마의 당선을 예견했다”거나 “드라마가 오바마를 당선시킨 일등공신”이라는 평이 나왔다. 이상적인 리더십을 보여준 팔머가 흑인 대통령에 대한 미국인들의 거부감을 줄여줬다는 분석도 있었다.

팔머 이후 ‘24’에는 여러 명의 대통령이 등장하는데 시즌6에는 데이비드 팔머의 동생인 웨인 팔머가 대통령으로 나온다. 이런 설정은 1960년대의 케네디 형제를 떠올리게 했다. 2008년 1월 방송을 시작한 시즌7에는 미국 첫 여성 대통령, 엘리슨 테일러가 등장했다. 방영 기간이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과정과 겹쳐 논란이 일었다. 경선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FOX 측은 “설정일 뿐 현실 정치와 아무 상관없다”고 선을 그었다.

‘30록(30 ROCK)’은 NBC의 코미디 드라마다. NBC가 스스로를 무대 삼아 TV 코미디쇼 제작진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쇼의 책임자인 리즈 레몬과 방송사 부사장 잭 도너기다. 잭은 골수 공화당 지지자이며 리즈는 자유주의 성향을 띤다. 완전히 다른 성향의 주인공을 통해 ‘30록’은 정치를 풍자하고 조롱한다.

2008년 5월 방송된 시즌2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딕 체니 전 부통령을 포함한 부시 행정부를 노골적으로 놀리는데, 잭은 NBC에서 해고당하고 워싱턴 정가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동성 간에 극단적 연애 감정을 유발하는 ‘게이 폭탄(Gay Bomb)’을 만들어 펜타곤에 보고한다. 체니 전 부통령 등이 모인 자리에서 실수로 게이 폭탄이 터지고 체니를 포함한 모두가 동성연애 감정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집권 말기 부시 행정부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동성애에 비판적인 보수 인사들을 조롱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또 딕 체니 외에도 실제 정치인의 실명이 대사에서 거론되기도 한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잭 도너기의 여자친구로 언급된다. 앨 고어 전 부통령이 환경운동가로, 마이클 블룸버그가 뉴욕 시장으로, 유명 선거 전략가인 제임스 카빌이 정치 컨설턴트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다.

『미드열전』을 쓴 문은실씨는 “한국과 미국의 문화적 다양성은 비교가 안 될 만큼 차이가 크다”며 “정서와 유머감각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국에선 정치에 대한 농담이 재치와 유머로 받아들여지지만 한국에선 ‘이렇게 심한 말을 하다니’라는 반응을 부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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