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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공간1번지] 2. 충무공 사적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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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대(臺)에 기대앉아 방패로 몸을 가리려 하고 그 뒤에서 이완(李莞.충무공의 조카)이 놀라 그를 부축하려고 황급히 달려온다.

충무공은 조카에게 눈동자를 돌리며 조용히 유언을 남기고 왼손을 가슴에 힘있게 댄다.

북채가 갑판 위로 뒹굴고 수군(水軍) 두명이 놀란 표정으로 달려오고, 다른 방향에서 활을 쏘고 있던 수군들이 경악하며 이곳으로 눈길을 돌린다.

모든 시선이 한 인간에게 모인다. 갑판 너머로 적선(敵船)의 잔해가 깔리어 있다. 새벽. 붉은 하늘. 푸르고 묵중한 바다.

찬란한 새벽의 비극.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코리아의 정점(頂点). 아침 이부자리에서 구상해 본 '충무공(忠武公)의 죽음' .

1966년 2월 24일 아침에 쓴 일기의 한 부분이다. 말미에 "다시 체계적으로 3월 초에 아산(牙山) 갔다 오고 5월에 격전장을 돌아볼 것. 여름에 작품 시작" 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서해에서 남해에 걸친 격전장들을 표시한 지도를 그려놓았다. 목포.명랑.우수영.벽파진.당포.한산도.통영.당항포.율포 등에 ×표를 해두었다.

그후 35년 만에 일기장을 넣어둔 상자를 뜯었다. 지금 읽어보니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투에서 유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구상해 놓고, 답사계획을 세워놓았다.

복식(服飾)의 고증을 받을 전문가들의 이름도 메모해 두었다.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놓은 것을 보니 이미 앞서 전 해에 충무공의 발자취를 더듬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일기를 마침내 찾았다. 65년 3월 21일.

"아산. 충무공에게 참배하다. 그가 쓰던 유물을 대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스케치. 아산의 널찍한 들판과 풍정(風情)이 마음에 들었다. 구장(區長)집에서 하루 묵고, 총총히 귀가. 현충사의 초상화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내 평생의 주제가 될 것이다. 내가 그에게서 느낀 것을 충실히 그릴 뿐이다. 아무래도 그림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화가 그 자신이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부모님께 외에 절이란 걸 해보았다. 두번 큰절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껏. 이제 갑옷에 대한 지식만 얻으면 그의 최초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이제 조국은 나의 안방처럼 되었다. 역사화(歷史畵)를 위한 나의 행각은 몇 천리가 될는지. "

고대 의상을 연구하는 석주선(石宙善)여사를 찾아뵌 것은 65년 2월 25일이었다. 친절하게도 많은 자료를 보여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역사화를 그리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나는 렘브란트를 좋아했다.

나의 조그만 스케치북에는 렘브란트의 역사화를 묘사한 것들이 많았다.

일기의 내용을 보면 조국의 땅을 발길 닿는대로 다니기 시작했던 때가 더 거슬러 올라가 64년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문리대 독문학과 4학년, 중병을 앓고 난 뒤였다. 큰 수술을 치르고 나서, "나의 내부에 쌓이고 쌓였던 슬픔.기쁨.증오.환희.경멸.권태.창조의 힘이 화산처럼, 그들의 갈등이 불꽃을 튀기며 솟아올랐던 것이다."

처음으로 정처없이 떠난 곳이 호남지방이었다. 그전만 해도 나는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 인생의 좌표가 정해지지 않았던 막연한 때였다.

호남선 야간 삼등열차를 탔다. 무슨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디든 멀리 서울을 떠나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부산에는 누님이 계셔서 자주 갔기 때문에 호남을 택했으리라. 초행길이었다. 목포.진도.통영을 스케치북 한권 들고 떠도는 사이에 뜻하지 않은 진귀한 현상을 발견했다.

조그만 사당(祠堂)들이 여기저기 많았는데,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예외없이 "충무공 사당" 이라고 했다.

사당이라면 한곳으로 충분할 텐데, 왜 가는 곳마다 이렇게 많이 있단 말인가. 한 인간을 제사하기 위한 사당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넓은 지역에 사당을 여러 곳 지을 만큼 백성들이 사모하는 위대한 인간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신(神)이 아닌가. 교과서에서 단편적으로 배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잠깐 나오는 장수에 불과한데 왜 이처럼 곳곳에 그를 기리는 사당과 비석들이 있단 말인가.

당시 나는 우리나라 문화에 어두운 편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위대한 인간이 없다는 열등감에 빠지기도 했다.

호남을 다녀온 후 곧 충무공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고, 바로 그의 인간성에 매료되었다.

그의 일기를 읽으며 나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나라의 흥망이 경각에 달린 급박한 상황에서 당파싸움으로 승리자가 죄인되어 억장이 무너졌겠지만 끝내 인내하며 천명에 순응할 뿐. 마침내 묵묵히 긴 칼 다시 짚고 "아직 열두 척이 남아 있습니다(尙有十二)" 라고 어리석은 임금에게 장계를 올린다.

마지막 전투 전날 깊은 밤. 초롱초롱한 별빛 아래 해안가에서 촛불을 켜놓고 무릎꿇고, 한사람의 적도 살려보내지 않겠노라고 비장하게 맹세하는 그의 처절한 모습은 나의 가슴을 저몄다.

그런 장면도 마음 속에 그림으로 구상해 두었다. 당시 나는 유화.붓글씨.사군자, 그리고 독서에 열중해 있던 때였다.

그래서 충무공을 주제로 한 '역사화' 란 장르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그 분야를 개척하기로 결심했다.

이후 목포-진도-통영-한산도에 걸치는 충무공의 유적을 여러번 답사했다. 지금은 누구나 답사를 하고 있으나 그때는 답사란 말을 들어보지도 못했다. 물어볼 사람도, 안내 책자도 전혀 없을 때였다. 걷다가 피곤하면 다방에서 쉬었다.

중병을 앓고 충분히 요양도 하지 못한 채 전국의 산천을 다녔기에 나날이 마르고 뼈만 앙상했다. 늘 죽음을 예감했다.

그 상태에서 나는 충무공의 영혼과 만났다.

"충무공은 역사를 창조한 최초의 인간, 최후의 인간. 비로소 시(詩)가 이 땅위에 노래 불려지고 그리고 그후, 우리들은 어떠한 노래를 들은 적이 있는가."

통영은 참으로 풍광이 아름다웠다. 그런 자리에 세병관(洗兵館)이 자리잡고 있었다. 충렬사(忠烈祠)에서 참배하고 한려수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제승당(制勝堂)에 홀로 서서 인적없는 한산도 전경을 둘러보며 마음이 착잡하다. 점점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크고 작은 섬들로 둘러싸여 호수 같다. 충무공이 긴 시름의 한탄을 시로 토로하던 곳. 1월 중순께라 차가운 강풍에 살이 엔다. 매섭다. 은파(銀波), 파도를 스치는 기러기떼. 때때로 바람이 자면 비단결같은 해면(海面), 고운 보리밭 언덕, 삼천포, 남해, 하동, 여수. 여수의 진남관(鎭南館)은 웅대했다."

여수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삼등열차에서 나는 건강에 대하여, 그림에 대하여, 조국에 대하여, 단(旦.훗날 나의 내자)에 대하여 생각했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렇게 일기에 썼다.

"충무공 유적의 중요한 것은 대강 살펴본 셈. 세개의 동상, 두개의 초상, 세곳의 지휘소, 세곳의 충렬사. 그리고 바다, 유물들, 섬들. 충무공을 새로운 각도로 검토해야 할 것을 느낀다. 그는 장군이기 전에 매우 종교적 인간이었다. 그렇게 표현해야 한다. 모든 성인이 그렇듯 그는 일생을 완전히 수동적으로 일관하여 산 인간이었다. 그는 전혀 반항하지 않음으로써 조국에 대한 더없는 가장 크고 위대한 반항으로써 반항했다."

참된 충무공의 모습을 파악하느라 밤잠을 못이룰 때가 많았다. 그러나 오랜 시행착오 끝에 결국 나는 "충무공에 좌초(坐礁)하다" 라고 일기에 썼고 갑자기 그림도, 충무공도, 모든 것을 버렸다. 미술사학을 연구하기로 결심하기 전 내 젊은날의 한 모습이다.

강우방 <이화여대 교수.미술사>

<강우방 교수는…>

▶1941년 만주 안동 출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미국 하버드大대학원 미술사학 박사과정 수료'

▶68년 중앙국립박물관 학예사

▶80년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86년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97년 국립경주박물관장

▶2000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저서〓미(美)의 순례 - 체험의 미술사(93년), 한국 불교의 사리장엄(93년),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99년), 법공(法空)과 장엄(莊嚴)(2000)

▶수상경력〓동원학술대상(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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