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비 친필일기 등 구한말 황족 유물 700여 점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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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영친왕은 1907년 12월 일본으로 가 장교 교육을 받는다. 오사카 지역 사단장으로 재직하던 1940년 무렵의 영친왕(왼쪽), 이방자 여사(오른쪽), 아들 이구.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미혼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신년이다. 왠지 모르게 즐거운 마음도 들고 또 아쉬운 마음도 든다’.

후에 영친왕비가 된 이방자(1901~89) 여사가 1919년 1월 1일 쓴 일기다. 설렘 반, 아쉬움 반. 영락없는 예비신부다. 일본의 황족이었던 그녀는 그해 2월 25일 약혼자 영친왕 이은(1897~1970)과 결혼하기로 돼 있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이방자 여사가 꽃다운 나이에 쓴 친필 일기 등 영친왕 관련 희귀 유물을 18일 박물관 지하 1층 로비에서 언론에 공개했다. 모두 재일동포 하정웅씨가 2008년 12월 한국에 기증한 것이다.

하씨는 영친왕이 친지들에게 받은 편지·엽서 150여 통, 사진 500여 장, 영친왕 내외의 일생을 다룬 20분짜리 영상물 등 총 706점을 기증했다. 그중 중요 유물만 일부 공개된 것이다. 박물관 유물과학과 정계옥 과장은 “일본어에 한자를 섞어 쓴 데다 고어체에 황실에서 쓰던 용어들이라 번역이 쉽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어린 나이에 일본 땅으로 쫓겨났던 황족들에겐 조선어보다 일본어가 더 익숙할 수밖에 없었던 게다. 1년여에 걸쳐 해독한 이들의 글에는 마지막 황족들이 보냈을 고난의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게 영친왕비의 1919년 1년치 일기다. 일본 황족 전용 일기장에 사흘에 한 번꼴로 일기를 썼다. 결혼을 나흘 앞둔 그해 2월 21일 오후 1시 비보가 날아든다.

‘경성에 계시는 이태왕(李太王·고종) 전하께서 뇌일혈로 오전 1시35분에 발병해 오전 7시50분에 중태에 빠지셨다는 보고였다. 아아, 지금까지의 기쁨은 이내 슬픔으로 변했다’.

고종은 결국 그날을 넘기지 못한다. 결혼식은 이듬해 4월로 연기된다. 기미년 마지막 날 일기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내 마음에 가장 깊이 남은 즐거운 추억은 오직 전하께서 오셨을 때의 기억이다. (중략) 슬픔이 변해서 기쁨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에 의해 강제 결혼한 충격으로 정신질환을 앓은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1912~89)에 비하면 영친왕비는 행복한 여자였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팍팍했다. 순정효황후(1894~1966·순종 비)가 61년 보낸 친필 한글 편지에서 ‘전번에 수길(의친왕 5남의 아명)이가 양 전하께 갔을 때 생계에 보태 쓰라고 다만 얼마라도 갖다 바쳤는지’라며 형편을 걱정할 지경이었다. 재산을 몰수당한 황족의 삶은 곤궁하기 그지없었던 게다.

여기저기 손 내미는 곳도 많았다. 영친왕의 조카손녀인 한주는 ‘자동차 문에 끼어서 손가락 세 개가 몹시 뭉그러졌다’며 병원비를 보태 달라는 편지를 썼다. 의친왕의 1녀 이령 역시 ‘저희들의 뻔뻔한 부탁, 그때마다 들어주신 것을 뭐라고 감사해야 좋을지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독립 후에도 대한민국 정부의 견제로 일본 땅에 발이 묶인 이들은 63년에야 고국으로 돌아온다. 유물 중 편지류는 덕혜옹주와 영친왕의 환국이 논의되던 60년대 초반 자료다.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을 모시고 서북순행을 하던 모습(왼쪽 위). 영친왕비의 일기(왼쪽 아래). 퇴위 후 덕수궁 함녕전에서 머물던 고종과 어린 영친왕(오른쪽).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올해는 대한제국이 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무명 작가가 쓴 소설 『덕혜옹주』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대한제국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역시 올해 대한제국 특별전을 연다. 정종수 관장은 “대한제국기 근대 유물 수집에 열중하고 있다”며 “영친왕 관련 자료도 올해 도록을 발간하겠다”고 말했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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