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그랜드 디자인] 통합유럽 이것이 과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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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유럽은 신대륙 발견에서 양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중심이었다. 이같은 힘은 유럽을 두 차례의 참혹한 전쟁으로 이끌었다.

종전 뒤 철저히 파괴된 유럽은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거인의 보호 아래 양대 진영으로 갈라졌다.

미국의 원조로 재건된 서유럽은 지난 반세기 동안 성장과 안정, 평화를 구가했다. 반면 소련 치하의 중.동부 유럽은 잊혀진 땅이 됐다.

공산주의 붕괴에 따른 냉전 종식과 독일의 통일, 유고와 소련의 분열은 유럽의 상황을 크게 바꿔놓았다.

1993년 탄생한 EU는 이러한 대혼란의 산물이다. 서유럽은 더이상 미국의 '말 잘 듣는 아이' 로 남는 데 만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멀리 발트해에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울타리를 치고 이곳을 '평화와 풍요가 있는 공간' 으로 만든다는 원대한 구상이 제기됐다.

하지만 EU의 이같은 구상은 필연적으로 네가지 과제를 수반한다.

첫째, 동유럽과 지중해 남.동부 국가들을 부흥시키는 것이다.

민족 분쟁이 상존하는 이 지역에 정치적 규칙을 제공함으로써 폭력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항구적인 안정에 이르게 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과 보스니아.코소보 등의 예에서 보듯 미국의 개입 없이 유럽이 게임의 주도권을 잡기는 아직 요원하다.

둘째, EU의 응집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자전거는 달릴 때만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

유럽의 통일도 단일 화폐와 공동방위, 동구 확대 등 21세기의 새로운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전진해야만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EU는 통일의 역동성을 잃지 않음과 동시에 확대로 인한 다양성을 정리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셋째, 소련 지역 특히 러시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EU가 가입 희망국을 무한정 받아들일 수는 없다.

소련 지역 국가들은 앞으로도 EU의 바깥에 남아 있겠지만 교역과 투자, 모든 방면의 협력을 통해 그들을 EU에 연계시켜야 한다.

만약 러시아와 그 이웃들이 혼란에 빠져들면 공산주의의 붕괴로 얻었던 모든 결실을 잃게 될 것이다.

넷째, 미국과의 신뢰 관계 유지다. 때론 미숙하고 때론 거칠어도 미국은 유럽을 세번이나 구했다. 미국이 없으면 유럽은 거대한 러시아가 버티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한 모퉁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유럽은 중요한 전환점에 있다. 냉전기간 중 유럽은 미국의 우산 속에서 경제 성장과 사회 연대 등 내부문제에 역량을 집중했다. 그처럼 평온하던 시절은 끝났다.

유럽은 다시 무대 전면에 나서게 됐다. 과거처럼 세계를 정복하기 위함이 아니라 주변의 도약을 돕기 위해서다.

유럽의 가장 큰 도전은 한 식구가 될 동부와 남부의 이웃 국가들에 경제성장의 경험을 전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유럽은 경제 통합과 교역의 증진을 위한 규칙을 확립해야 한다.

필립 모로 드파르주 <프랑스국제관계연구소 ifri 책임연구원.프랑스 정부 국제관계 자문위원>

정리=이훈범 파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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