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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 음악가 에케르트, 대한제국 군악대장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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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음악회를 마친 후 외국인 청중들과 함께한 한국 군악대원들. 1902년. 원내는 프란츠 에케르트. 에케르트는 한국에서 실직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회현동 자택에 머물며 개인교습 등으로 생계를 잇다가 1916년 8월 6일 6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진=『격동 한반도 새지평』)

몸이 음악을 만나면 춤이 된다. 가무(歌舞)가 늘 함께 붙어다니는 데에서 알 수 있듯, 음악은 사람의 몸 동작을 규율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몇 해 전부터 서울 여기저기에서 ‘수문장 교대식’이라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그 행사를 볼 때마다 ‘과연 저 악기 저 음률과 저 동작이 어울리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발걸음 하나하나까지 세밀하게 규제하는 근대적 제식훈련은 서양 군대에서도 19세기에 접어들 무렵에야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881년 별기군을 창설하면서 일본에 유학 보냈던 나팔수가 귀국한 뒤 곡호대(曲號隊)라는 부대를 창설한 것이 서양 악기로 신체를 조율한 첫 사례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한국 군대는 복장, 훈련 방식, 무기 등 모든 면에서 서양식을 채택했다. 궐내에 외국인을 불러들여 베푸는 연회도 무척 잦았다. 이래저래 서양 음악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1901년 2월 19일, 프로이센 육군 군악대장으로 있던 프란츠 에케르트(Franz von Eckert)가 50인조용 악기를 가지고 입국했다. 그는 1879년부터 1899년까지 일본 군악대를 육성했던 사람으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도 작곡했다.

에케르트는 부임하자마자 미리 조직되어 있던 군악대원들에게 서양 악기와 악보를 가르쳤다. 군악대가 고종과 각부 대신, 각국 외교사절 앞에서 첫 연주회를 가진 것은 그로부터 6개월 남짓 지난 9월의 일이었고, 외국인들은 그들의 훌륭한 연주 솜씨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무렵 에케르트는 ‘대한제국 애국가’도 작곡했고, 이 곡은 이듬해 8월 15일 공식 국가로 선포되었다. 정부는 1902년 6월 12일 탑골공원 서쪽 구석에 군악대 건물을 지어 에케르트의 음악 교습을 지원했다. 그는 이곳에서 군악대를 훈련시키는 한편, 매주 목요일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무료 음악회를 개최했다. 서울 시민들은 이 연주회를 통해 서양 음악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 나갔다.

1907년 한국 군대가 해산될 때 군악대는 이왕직(李王職) 양악대(洋樂隊)로 재편되었는데, 에케르트는 이때 사임했다. 고종 사후 이왕직 양악대가 해산당하자 에케르트가 키운 ‘동양 최고의 악수(樂手)’들은 자기들끼리 경성악대를 조직했지만 1924년에는 더 버티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자취는 이제 탑골공원 옆에 있는 한국 최대의 ‘악기상가’에서나 희미하게 찾을 수 있을 따름이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다. 망국을 모면하려 했던 옛 제국의 안간힘을 기억하는 의미에서라도, 덕수궁 앞 수문장 교대식만큼은 ‘대한제국 군악대 행렬’로 바꾸는 것이 어떨는지.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