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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명동성당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 을 영화화한 '노트르담의 꼽추' 에는 집시여인 에스메랄다가 압제자 프롤로에게 쫓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 순간 주인공인 꼽추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를 데리고 노트르담 성당 안으로 도망쳐 그녀를 구한다.

이처럼 중세 서양에서 성당이나 교회는 법률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불가침의 성역이었다. 죄인들이 이곳으로 피해도 그가 제발로 나오기 전에는 잡을 수가 없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는 마태복음 11장28절의 말씀처럼 누구나 받아주는 '하나님의 집' 에 감히 세속의 권력이 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어로 성당이나 교회를 통칭 '생추어리(sanctuary)' 라고 하는데, 원래 이 말은 '신성한 곳' 이란 뜻이었지만 이같은 이유 때문에 '피난처' '피난권' , 혹은 '죄인에 대한 비호권(庇護權)' 이란 의미로 사용된다.

원래 고대 히브리 도시에서 유래한 이같은 전통은 로마시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처음 인정됐고, 교황 레오 1세가 서기 460년 이를 공식 승인했다.

처음에는 교회나 성당 건물 자체에만 이같은 피난권이 인정됐지만 차차 성당 구내 등으로 확대됐고, 나중에는 외국의 대사관에도 이같은 권리가 인정됐다.

그러나 영국이 1697년 의회령으로 이를 금지했고 나머지 유럽국가들도 18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를 철폐했다.

이같은 서양 기독교의 전통은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20세기 후반 한국에 전파된다. 바로 명동성당이다.

1976년 함세웅.김승훈 신부와 김대중 대통령 등이 '민주구국선언문' 을 발표한 이후 명동성당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메카로 변한다.

87년 6월항쟁을 비롯, 숱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이곳에서 전개됐지만 명동성당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경찰도 함부로 성당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95년 한국통신 노조의 농성 때 경찰이 진입, 이같은 불문율이 깨지긴 했다.

그러나 민주화 투쟁이 끝난 이후 명동성당은 각 이익단체들의 농성장으로 변해 신도들을 안타깝게 했다.

최근 '성지에 너무 깊은 상처를 준' 한국통신 노조의 천막농성을 계기로 참다 못한 명동성당이 성당의 허가 없는 시위나 농성의 원천봉쇄를 경찰에 요청했고, 경찰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이다. 잘한 결정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뭔가 허전한 구석이 남는다.

유재식 베를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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