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키워드로 본 사회 신풍속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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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금기 허물기 '작은 반란'

◇ 엽기〓 "거참 엽기적이야. " 올 한해 우리 사회를 휩쓴 유행어 중 으뜸은 역시 엽기(獵奇).

엽기의 사전적 의미는 '기괴한 일이나 물건에 호기심을 가지고 즐겨 쫓아다님' 이다. 하지만 올 한해 한국사회에서 이 단어는 이런 의미를 완전히 벗어났다.

더럽고 지저분하며 때론 잔혹함. 보는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선한 충격을 줄 때 젊은이들은 '엽기적' 이라고 말한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엽기 사이트가 크게 유행했다. 이들 사이트에는 똥.시체.방귀.구토.섹스 등 내놓고 입에 올리기 힘든 단어나 내용이 담겨졌다. 유머와 결합한 '엽기 시리즈' 도 나돌았다.

문화평론가들은 "엽기가 사회의 기존 금기를 거침없이 까발리고 거리낌없이 공론화한다는 점에서 기존 질서와 관습에 대한 도전 성격을 지녔다" 고 평가했다.

*** 줄잇는 의혹 충격 허탈

◇ 게이트=각종 '게이트(정.관계 의혹사건)' 로 얼룩진 한해.한빛게이트(한빛은행 불법대출 사건)와 鄭게이트(벤처기업 KDL 정현준 사장의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 陳게이트(MCI코리아 진승현 부회장 주가조작 사건) 등이 풍미했다.

게이트의 여파로 정.관계 인사들이 희생당했다. 비리에 연루된 인사들이야 자업자득이지만 억울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사건을 수사한 검찰 역시 덩달아 화를 입었다.

벤처업계가 입은 상처도 심각했다.금고 돈 불법 인출.문어발식 사업확장.주가 조작 등을 통해 수천배씩 재산을 불린 신흥갑부들의 행태가 드러나면서 벤처업계를 더욱 침몰시켰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피해를 본 것은 서민들이었다.

어떻게 돈 한푼 없이 금융기관을 인수했나…. 한 은행지점에서 일개 업자가 어떻게 수천억원대를 대출받았나…. 이런 의구심이 배신감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은 허탈해 했다.

*** 인터넷 관음 희생양

◇ 백양 비디오〓 "너, 그거(B양 비디오) 봤니?" "내가 e-메일로 보내줄게. "

유명 여가수의 정사 장면이 적나라하게 담겨 '필승 비디오' 라고도 불렸던 B양 비디오 유출 사건.

지난해 'O양 비디오 사건' 이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불거진 유명 연예인의 사생활 노출 사건은 인터넷 시대가 몰고온 '그늘' 이었다.

이 비디오의 주인공인 가수 백지영씨는 "너무나 수치스럽지만 내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노래하고 싶다" 고 눈물로 호소했다.

올 한해 유난히 인터넷으로 화를 당한 유명인들이 많았다.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했다는 미스코리아 후보들의 수영복 차림 사진과 모 여배우가 무명시절 찍었다는 포르노 등이 초고속 통신망을 타고 확산됐다.

이들은 모두 교묘하게 합성된 사진이나 영상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들은 저급한 인터넷 문화와 훔쳐보기 세태가 만들어낸 슬픈 사회상이었다.

*** 썰렁한 세태와 궁합

◇ 삼행시=삼행시 열풍으로 온 국민이 '삼행 시인(詩人)' 이 됐다.

올해 초 한 TV 오락프로에서 삼행시 짓기가 선보인 데 이어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서 경연대회가 벌어졌다.

삼행시 동호회 및 전문 사이트까지 등장했다. 어린이 날을 기념해 청와대 홈페이지가 벌인 삼행시 공모전에는 3천여명이 참가할 만큼 그 열기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특히 삼단논법을 갖춘 기존의 삼행시 개념과 달리 문맥과 논리 전개를 무시한 썰렁하고 황당한 내용이 인기를 누렸다.

예컨대 '말 : 말미잘하고/미 : 미꾸라지하고 사귄대/잘 : 자~알 논다' 나 '피 : 피카추가 침을 뱉는다/카 : 카~악/츄 : 추접해' 등이 그것이다.

전문가들은 삼행시 인기가 ▶압축적▶감각적▶즉흥적인 디지털 시대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새 밀레니엄과 궁합이 딱 맞다고 할까.

*** 주민들 저항에 수난

◇ 러브호텔〓유럽의 고성(古城)을 조악하게 본떠 만든 러브호텔들이 난립하자 어린이들이 놀이공원이라고 착각하는 지경이 됐다.

올 하반기 들어 경기도 고양시를 필두로 의정부.성남.인천.대구 등지의 시민들이 주택가 주변에서 러브호텔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 을 선포했다. 이들의 행동은 주택가 불건전 업소를 방치해온 행정당국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특히 고양시 공동대책위원회의 활동은 놀라웠다. 행정당국이 학교환경정화구역 안에 짓고 있던 러브호텔에 공사 중지 명령을 내리고 준공검사를 내주지 않게 만든 것이다.

*** 집단이기? 개혁선구?

◇ 의쟁투=올해는 의사들이 거리의 투사로 나선 초유의 해였다. 4월부터 11월까지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언론에 등장한 단어가 의쟁투(의권쟁취투쟁위원회)였다.

의쟁투는 약사법 재개정 등 의약분업(7월 시행) 보완을 줄기차게 요구하며 다섯 차례의 의사 폐업.파업을 주도했다.

적지 않은 환자.시민들은 의쟁투를 '환자를 볼모로 한 초강경파 집단' 으로 생각한다. 정부는 의사들의 힘 앞에 굴복해 의쟁투의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함으로써 힘으로 밀어붙이면 된다는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그런 한편 의쟁투는 후진적인 의료제도 개혁의 당위성을 전국민적인 의제로 끌어올렸다.

의쟁투는 끝까지 강경투쟁을 주도하다 이달 중순께 힘을 잃고 이름만 유지하고 있다. 병.의원 가동도 어렵사리 정상화됐다.

*** 동성애 논란 수면위로

◇ 커밍아웃〓10월 초 탤런트 홍석천씨가 '커밍아웃(comingout: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히는 것)' 하면서 동성애 문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커밍아웃은 'come out of closet(벽장 속에서 나오다)' 라는 말을 줄인 표현. 기존 질서 안에서 답답하게 살아야 하는 성적(性的) 소수자들에게 洪씨의 행동은 권리찾기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洪씨의 고백이 한 월간지와 스포츠신문들을 통해 소개된 뒤 그는 출연하던 TV프로에서 '자의반 타의반' 으로 중도하차했다.

인권.사회단체들은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모임' 을 결성, 방송출연 정지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논쟁이 거셌다. "변태적 성애 또는 성적 일탈" 이라는 주장과 "개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인권 탄압" 이라는 논리가 맞섰다. 아무튼 洪씨의 커밍아웃은 동성애 논쟁의 서막이 됐다.

전진배.기선민.정용환.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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