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36) 봉일천의 비장한 후퇴 명령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미 공군기가 1950년 7월 3일 한강 철교를 폭격하는 장면이다. 오른쪽에 그해 6월 28일 육본 명령에 따라 폭파돼 끊어진 한강 인도교 모습이 보인다. [미 육군성 전사 자료]

300m 정도 떨어져 있는 야산으로 키가 작은 몽골말들이 올라가고 있었다. 1950년 6월 28일 정오를 넘겨 오후로 접어 들어가던 무렵이었다. 파주 봉일천초등학교에 차려진 1사단 전방지휘소(CP)에서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적군이었다. 기관총과 박격포를 말 등에 실어 나르는 기마대(騎馬隊)였다. 바로 눈앞에 적이 나타난 것이다. 곧이어 총탄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사단사령부에는 참모와 지휘소 요원 30여 명이 전부였다. 우리는 CP를 나와 봉일천 건너편의 둑으로 뛰었다.

총탄이 우리의 뒤를 바짝 쫓아 왔다. 허겁지겁 둑에 올랐다.

이제 마지막이다. 나흘 동안 적과 마주친 상황에서 1사단 병력은 충실히 싸웠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의 항전은 불가능했다. 나는 각 연대장과 참모장, 직할 부대장들을 한군데에 모았다.

이때 비행기 한 대가 큰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봉일천 둑, 우리가 서 있던 쪽을 우회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저 옆으로 폭탄을 퍼부었다. 폭탄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그리고 비행기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돌아갔다. 일본에서 발진한 미군의 폭격기였다. 개전 당일 유엔결의에 따라 일본에 있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가 유엔군 총사령부를 겸하면서 우리를 지원한 것이다.

나는 부하들을 향해 비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잘 싸워줘 고맙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 각자 살길을 찾아서 후퇴할 수밖에 없다. 마침 미군 비행기가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미군이 참전했다는 표시다. 희망을 갖자. 그리고 끝까지 싸우자. 병력을 잘 챙겨서 한강 남쪽으로 가자. 1차 목표는 시흥이다.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시흥이 불가능하다면 마지막으로 지리산에서 만나 게릴라가 되어 적과 싸우자.”

이런 내용이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참모들이 예하의 각 연대와 대대에 연락을 했을 것이다. 전선을 내주고 모두 후퇴해 시흥에서 집결하고, 그게 어려우면 지리산에서 다시 만나 게릴라로 싸우자는 내 명령을.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한 일종의 맹세(盟誓)였다. 깊은 지리산 속에 들어가 게릴라로 버티면서 시간을 벌어보자는 그런 다짐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이 언제 좋은 결과를 맺을지는 그 순간 어느 누구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퇴로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은 한강의 이산포(현재 경기도 일산)로 건너가자고 했다. 15연대장 최영희 대령은 행주나루가 낫다고 했다. 둘을 선발대로 먼저 출발시켰다. 나는 나머지 사단 요원과 함께 먼저 이산포에 갔다. 최경록 대령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상류 쪽으로 차를 돌려 행주나루로 갔더니 최영희 대령이 보였다. 나룻배가 10여 척 있었고 뱃사공도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최영희 대령은 공병 출신으로서의 경험을 발휘했다. 나룻배 두 척에 널빤지를 얹어 지프도 실을 수 있게끔 했다.

그는 저녁 식사로 닭 열두어 마리도 준비해 놓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흘 정도는 굶은 것 같았다. 전선에서 계속 밀리며 밥을 거의 입에 대 본 기억이 없었다. 시장기가 컸지만 나는 차마 입을 댈 수 없었다. 전선에서 어떻게 철수를 하는지, 그 생사도 알 수 없는 부하들을 두고 기름진 닭고기를 먹는다는 게 그저 죄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냥 거절했다. 우리 일행은 최 대령 덕분에 지프 두 대까지 싣고 무사히 강을 건넜다. 최 대령(훗날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 역임)은 이제 고인이 됐다. 더 이상 고마움을 표시할 기회가 없어 아쉬울 뿐이다.

강을 건넌 뒤 지프는 그냥 버렸다. 한강 남안으로 와서 보니 김포와 영등포 쪽에서 모두 연기가 피어오르고 총성이 들렸다. 지프로 길을 간다면 적에게 노출될 게 뻔했다. 그래서 지프 두 대를 강 아래로 밀어버렸다. 밤새 걸었다. 배고픔과 함께 갈증이 심해지고 있었다. 부관 김판규 대위가 논두렁에 고인 물을 떠가지고 와 시원하게 마신 기억이 난다. 강아지 소리가 들리기에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김 대위는 “(13연대장) 김익렬 대령이 강아지를 품에 안고 왔다”고 대답했다. 나는 ‘이 전쟁 중에 땅개를 데리고 다니니 참 이상한 취미’라는 생각을 했다. 패주하면서도 그런 여유가 있는 것을 보니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한강은 적막했다. 적에게 쫓기기 전에 보던 임진강처럼 말이 없었다. 나중에 서울을 다시 탈환해 북진할 때, 중공군에 밀려 서울을 내줄 때, 그리고 다시 서울을 수복했을 때 나는 늘 이 강을 보았다. 한강은 늘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마치 거대한 꾸지람이 담겨 있는 듯했다. 패주하는 군인으로서의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짙어지는 어둠 속에서 일행과 함께 진창길을 질척거리며 걸었다. 어느덧 나는 이 전쟁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적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궁리하며 그 어둠을 헤쳐가고 있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원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이 일본 점령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1945년 8월 요코하마에 설치한 연합군 최고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of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로 출발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과 연합군을 지휘하는 유엔군 총사령부 역할도 함께 맡았다. 미군의 동아시아 담당 사령부로서의 역할도 겸해 ‘극동군사령부(FEC·Far East Command)’라고도 불렸다. FEC 예하에는 미 8군 사령부, 극동해군 사령부, 극동공군 사령부를 설치해 한반도와 일본 열도 등의 미군을 지휘했다. GHQ는 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의 발효와 함께 폐지됐으나 FEC는 군사적 기능을 계속 수행했다. 미 정부는 57년 7월 1일 도쿄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를 해체하고, 유엔군사령부는 서울로 이전했다. 유엔군사령관(초대 사령관 조지 데카 대장)이 주한 미8군 사령관을 겸임토록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선엽 장군

ADVERTISEMENT
ADVERTISEMENT